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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6-28 (일) 12:54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17강-1.hwp (29KB) (Down: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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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17강]쉬게 하리라
2020년 마태복음 제 17강
말씀 / 마태복음 11:1-30절
요절 / 마태복음 11:28절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팬텀싱어를 보고 있노라니, 음악이 영혼에 쉼을 줄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래하는 당사자들은 얼마나 살 떨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응원팀에 감정이입 되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높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일수록 많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집니다. 그 점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가장 은혜로운 타이틀이라 믿습니다. ‘쉬게 하리라’ 어떤 경우에는 무서운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냥 계속 쉬게 해줄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쉼이 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쉼은 장소의 문제 혹은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쉼은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참된 쉼을 누릴 수 있는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의에 빠졌습니다.(2)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다시 기다려야 합니까?”(3) ‘그리스도가 맞나요?’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내려오심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이 어찌 이리도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일 년 정도 요단강 동편 마카이우스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 감옥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풀려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죽음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자기의 처지에 비추어 생각하면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은 어디에 있는가?’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십자가와 부활과 만민 복음 전파와 예수님의 재림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는데, 그리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시공간에 갇혀 있기에 세례 요한처럼 힘든 현실을 만나면 비슷한 문제의식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지진을 일으켜 풀어주신 것처럼(행16:26), 감옥을 무너뜨리고 요한을 풀어주시면 다시 굳건한 믿음위에 서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본 것을 다시 가서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4) 그것은 맹인이 보게 되고 못걷는 사람이 걷게 되고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5) 세례 요한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다시 들어도 별로 은혜 받지 못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가 살아난들, 그것이 세상의 변화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헤롯왕이나 빌라도 총독같은 거물급 인사들, 김정은 위원장같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역사가 아닙니다. 목자의 에너지를 빼먹는 그런 사람들을 돕는 이야기가 무슨 비전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서 다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서 35장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사35:6) 그리스도는 세상의 중심에 서기 위해 사람들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입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절망과 불신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다시 믿음위에 굳게 서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했던 몰트만 박사는 16살의 나이에 독일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파우스트’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 권의 책을 품고 군대에 입대합니다. 하지만 18세에 붙잡혀 3년 동안 전쟁포로가 됩니다. 그는 고통스런 수용소생활을 보내며 절망가운데 있다가 미군 군목으로부터 받은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때 시편에 나오는 탄원시가 몰트만에게 부딪혀 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말씀이 잠들어있던 몰트만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나의 절망과 고통을 이해하는 분이 계시는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전쟁같이 참혹한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연결되는 희망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전심으로 노력하였는데, 그런 수고와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할 때입니다. 힘든 문제, 고통의 문제만 바라보면 믿음을 잃고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사랑의 증거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예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인류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만민구원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거센 핍박을 이기고 지구촌 곳곳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세상 어떤 나라보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세례 요한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음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 말씀에 약속된 마지막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임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을 깨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할 것이며, 선악을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 버리고 사망과 어둠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승리를 확신하고 믿음위에 굳게 서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며 용기있게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설명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눈앞의 유익이나 주변 분위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7) 당장의 이익을 위해 의리나 부르심을 팽개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흔들리는 갈대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세상 영광 때문에 낙심한 사람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8)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대가 아니라 푸르른 소나무처럼 지조있는 사람이었으며, 권력자의 부정에 맞서 회개하도록 도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9)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 준비를 시키러 온 주의 사자였습니다.(10)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는 최고의 칭찬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세례 요한을 높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가 누구일까요? 죽기 전에 구원받은 십자가 우편강도같은 사람, 혹은 세리 마태처럼 죄 많이 짓다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인간 대 인간의 비교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느냐의 문제로 비교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예수님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새 시대, 천국이 침노당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12-14) ‘침노한다’는 것은 ‘습격하여 탈취한다. 점유한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이 믿음으로 밀고 들어와서 천국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리도 믿음으로 천국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창기도 믿음으로 천국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두드리는 자에게 천국문이 열립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혈루증 앓던 여자도 믿음으로 나음받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세리가 복음의 일군으로 쓰임받는 시대가 열립니다. 귀 있는 자들이라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15)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16) 마치 같이 놀자고 초청해도 응답하지 않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놀이는 결혼잔치 놀이와 장례식 놀이였습니다.(17) 이쪽 편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편에서 춤을 추고, 저쪽 편에서 슬프게 울면 이쪽에서 가슴을 치며 ‘아이고, 아이고’ 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춤추다가 곡하다가..., 서로 호응하며 웃고 울게 만드는, 호흡이 중요한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어떠한 메시지에도 아무 반응 없이 stone face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금식의 스피릿을 담아 회개의 복음을 전하자, ‘미쳤다,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18)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은혜의 복음을 전하자, ‘영성이 없다, 타협한다’며 비난했습니다. 저들은 그냥 지금 이대로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도 도무지 달라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한가지 방향을 굳게 붙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 지혜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평가를 받습니다. 거짓과 타협의 일을 했으면 악한 사술이며, 회개와 은혜의 일을 했으면 옳은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20) 특히 대표적인 곳이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벳새다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던 현장이며, 가버나움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곳입니다. 은혜를 많이 입은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21) 교만과 쾌락의 도시로 알려진  두로와 시돈보다 벳새다가 더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22) 가버나움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며,(23) 타락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소돔보다 더 악하다고 하십니다.(24) 갈릴리 사람들이 들으면 억울하다며 화를 낼만한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질렀다고 두로나 소돔에 비교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문제 있어도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왜 이리 갈릴리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두로와 소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운데 회개하지 않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자기 중심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지혜있는 자나 슬기로운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해야 마땅했습니다.(25) 그들은 성경을 알았고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지혜롭고 슬기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반면 물고기 잡는 어부나 세리처럼 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 나섰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일수록 능력있고 탁월한 사람들을 모으기를 원합니다. 반면 어린아이처럼 탁월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기쁨으로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부들과 세리를 데리고 어느 세월에 유대를 복음화하고 만민구원역사를 이룰 것인가!’ 탄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낙심하기는 커녕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영접했습니다.(26)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어린 아이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계시됩니다.(27)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능력이나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역사가 아니라 어린 아이같은 겸손한 사람들이 변화되어 복음역사의 기둥으로 쓰임 받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을 더할수록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배우고 작은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화답하는 사람들로 살고자 힘써야 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입시의 짐, 취업의 짐을 진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도 의를 위하여 수고하다가 무거운 짐에 눌렸습니다. 차원높은 인생을 살고자 할수록,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고자 할수록, 복음 역사를 위해 수고할수록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세상은 실낙원이 되었습니다. 성실맨, 능력맨이 되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성실하고 진실할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인간의 삶은 점점 빈곤해지고 피곤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어 편안하게 쉼을 누리며 살리라 기대하지만, 그것은 또다른 짐을 지는 생활의 출발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맡은 자리에 앉을수록 무거운 짐은 줄어들지 아니하고 점점 늘어갑니다. 사명의 짐, 생활의 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짐이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 경쟁심을 다스리지 못해 돌로 쳐 죽였습니다. 동생이 사라지면 마음도 편해질 줄 알았는데, 동생이 사라져도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혹은 저런 사람만 있으면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거짓된 안식입니다.
죄짐, 생활의 짐, 사명의 짐이 무거워질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정죄입니다. ‘너, 이 정도 짐 하나 감당 못하고 뭐하는 건데?’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거나 다가올 장래 염려를 보며 자책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춘기 뿐만 아니라 사추기를 맞이하는 분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위로 연로한 부모님을 보면서 ‘내가 좀 더 잘 섬겼어야 하는데...’, 아래로 점점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때 이렇게 도왔어야 하는데.’... 자책할 수 있습니다. 체력은 떨어지고 생활의 십자가는 점점 무겁고, 그러다가 양이라도 한 사람 떠나가면, ‘내가 자기문제에 빠져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구나!’ 이중으로 고소를 받아 신앙생활에서조차 안식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쉼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가장 즐겨찾는 방식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혹은 여행을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게임에 몰두합니다. 혹은 맛집을 돌아다니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런 시간들이 잠시의 쉼을 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죄짐이든지, 생활의 짐이든지, 사명의 짐이든지, 무엇으로 수고하고 무거워졌든지, 다 예수님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심으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간음중에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박고 비웃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은 부활을 목격하고도 사명을 피하여 디베랴 바다로 떠나간 베드로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빈 그물을 채워주시고 조반을 차려놓고 초청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은 열심히 수고하여 열매를 남긴 자들의 기쁨에 같이 참여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열고을 권세에 참여하라” 예수님은 열심히 수고했으나 배척당하며 고난을 겪은 자들의 아픔에도 동참하십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 결단코 그 상을 잊지 아니하리라”(10:42)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담당하여 주십니다. 성령을 보내사 생활의 십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할 능력과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수고롭고 무거울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 갖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쉼을 약속하시면서 짐을 덜어주기보다 멍에를 지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소나 말이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에 어깨 위에 얹혀놓는 구부러진 막대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 어깨에 메는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는 멍에를 메야 제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멍에가 소의 몸에 잘 맞으면 편안히 밭을 갈 수 있고, 멍에가 좋지 않으면 힘은 힘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29) 중동지방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메는데, 경험 많은 소와 신입소를 같이 묶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입소는 경험소를 따라 일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영적이지 않은 우리와 함께 하사 겸손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그를 통해 믿음도 배우고 은혜도 누리고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처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십자가가 가벼워지고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워지는 것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다른 멍에를 멥니다. 욕심의 멍에, 자기 영광의 멍에, 염려와 두려움의 멍에를 멥니다. 욕심으로 죽어라 노력하는데 기쁨이 없고 두려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감사가 없고 겉보기에는 빛이 나는데 그 안에는 생명력이 없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라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배우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예수님 멍에는 쉽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습니다.(30) 예수님의 멍에는 나를 죽일 것 같은데 살아나게 하고, 나를 망하게 만들 것 같은데 은혜와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은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로 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축구를 많이 보는 것이 곧바로 축구 실력의 성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머리에 기억한 대로 실제 운동장에서 해보면서, 치열한 시합의 현장에서 적용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도 그러합니다. 실제 문제 앞에서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며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야 합니다. 삶의 여정에는 생각하지 못한 고난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뼈아픈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나기도 하고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를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때 도망치고 숨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여 예수님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하나 둘 쌓이고 몸에 익혀질 때, 어떤 상황,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요동하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멤으로써 힘있게 십자가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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