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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8-02 (일) 10:48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22강-1.hwp (29KB) (Down: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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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22강]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2020년 마태복음 제 22 강
말씀 / 마태복음 14:1-36
요절 / 마태복음 14:20,21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었더라”

우여곡절 끝에 여름수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름수양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팀장목자들과 많이 고민했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 저렇게 하면 저런 문제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안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여야 한다는 절대 명제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는 우리 목자들의 진심과 믿음을 축복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 명령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말씀으로 와 닿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충격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1,2절을 보면 헤롯왕이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와 결혼합니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백성들은 왕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분명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헤롯은 회개하기는 커녕 요한을 감옥에 집어 넣어버립니다.(3,4) 다만 여론을 의식하여 차마 죽이지는 못했습니다.(5) 그런데 헤롯만 요한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과 눈이 맞아 결혼한 헤로디아도 요한을 지독히 싫어했습니다. 그녀는 헤롯의 생일잔치에 딸을 보내어 춤추게 합니다.(6) 엄마는 무희들이나 서는 자리에 딸을 보내어 춤추게 하고, 아빠는 딸의 요염한 춤을 보며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며 큰소리를 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개념 없는 부부였습니다.(7) 헤로디아는 남자보다 악랄하기가 한 수 더합니다. 딸의 옆구리를 찔러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8) 헤롯은 자기 체면을 세우고자 딸아이의 춤 값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10,11) 왕이라는 인간이 음란하고 충동적이며 자기 과시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허망하게 죽어버렸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장렬한 전사도 아니고, 사고의 현장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다가 스러진 아름다운 죽음도 아닙니다. 여자 아이의 춤 값으로 바쳐진 개죽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 나라에 정의가 있는가?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을 만큼 무능하신 분인가!’ 세례 요한 본인도 힘들었겠지만, 그 일을 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것이구나! 믿음으로 살아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구나! 불신이 먹구름처럼 이스라엘 전역을 뒤덮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은 불의한 소식을 듣고 떠나 빈들로 가셨습니다. 불의한 소식을 들었으면 촛불집회를 하든지, 세례 요한을 뒤따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든지, 당당하게 맞서는 용감한 행동을 보여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빈들로 가시다니..., 두려워서 비겁하게 도피하는 모습, 혹은 이스라엘의 고통에 아무 관심 없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무기력, 무책임, 무능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자주 아무도 없는 빈들로 가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광야로 가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큰 역사를 이룬 후에도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힘들 시기일수록, 중요한 문제를 만날수록 빈들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소리, 세상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이런 문제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문제해결 자체보다 문제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 제자들을 리더로 훈련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믿음을 심고 목자의 심정과 영적 가치관을 갖도록 도전하십니다. 제자들을 키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그 방향대로 움직입니다.
힘든 일을 만나면 방황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처럼 빈들에 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UBF역사도 그러합니다. 1961년 4.19혁명, 5,16쿠데타로 수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청년들이 고통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절망과 어둠에서 건져 주십시오.” 그때 “그러면 너가 도와주어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년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시간이 청년선교와 세계선교역사를 시작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힘든 일을 만나는 그때, 문제만을 보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닙니다. 문제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새 희망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항상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희망의 싹을 피우고 죽었다 생각하는 자리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만날수록 빈들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가시자, 수많은 무리들이 여러 고을로부터 예수님을 따라 나왔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스승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을 보면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면, 사나운 늑대의 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에게 목자가 없으면, 험악한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죄와 사망의 그늘로 끌려갑니다. 성공의 자리에 있으면 죄의 유혹에 끌려가고 실패의 자리에 있으면 절망과 불신의 시험으로 끌려갑니다. 반면 아무리 힘든 시대라 할지라도 믿고 의지하며 배우고 따라갈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있다면 견딜 수 있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해줄 목자가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대학생들이 머리가 나빠서, 스펙이 딸려서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제시할 목자가 없기에 현실에 지배당하는 것이며, 진리를 비추어질 목자가 없기에 삶의 가치와 푯대를 잃고 떠도는 것입니다. 내게 보내신 사람들을 버려두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는 목자가 있다는 것이 그 시대의 희망입니다. 가정에 목자가 있어야 하고 캠퍼스에 목자가 있어야 하고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배우는 목자가 있다면 어디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길 몰라 방황하며 몰려든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습니다.(15) 빈들에는 편의점이나 파리바게뜨도 없었고, 제자들은 자기 끼니 해결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해져가는데, 제자들은 근심과 염려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돌려보내어 각자 dutch pay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거절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정치인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대학총장도 아닙니다. 돈 없고 피곤한 사람들임을 뻔히 알면서도, ‘너희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당히 의도적입니다. 헤롯은 백성들을 먹이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양들을 먹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목자 없는 시대가운데 목자가 되라,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는 성실맨 정도가 아니라 백성들을 돕고 살리는 목자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머리는 천재처럼 핑핑 돌아가는데, 마음은 돌처럼 딱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옆 사람이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제자들도 아마 처음에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책임을 지우신 것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에 서서 배우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엄마, 아빠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엄마, 아빠가 되어 자녀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 있다 보니까, 처녀 총각이 엄마가 되어가고 아빠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지한 가운데 한 생명을 책임지면서 진짜 엄마가 되고 진짜 아빠가 됩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도 책임지는 자리에 서면서 목자의 심정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예수님 말씀에 당연히 반발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들을 먹여야 합니까!, 말도 안되는 억지 부리지 마세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면 부담스런 표정을 하면서도 응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먹일 수 있지?’ 예수님의 명령 앞에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고민가운데  목자의 심정을 배우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책임감과 함께 믿음을 가지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형편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17) 현실만 생각하면 목자의 심정을 배우기는 커녕 절망과 불신만 커져갈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만 바라보면 먹일 수 있는 상황이 거의 없습니다. 학생은 학생이어서 먹이기 어렵습니다. ‘학생이라서 돈도 없구요, 경험도 부족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여유가 없어요’ 학사는 학사이기에 어렵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도 힘들어요!’ 사모들은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가진 것만을 생각하면 항상 부족하고 항상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비밀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어 언제든지 새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없는 것으로 일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일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밖에 없다는 제자들에게 ‘준비성이 없다’며 책망하지 않았고 없는 돈을 만들어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있는 것을 가져오라 하십니다.(18)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니’, 축사는 감사기도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했다면, ‘하늘이시여,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입니까!’ 감사보다 원망을 쏟아내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빵과 물고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거두어보니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였습니다.(20) 먹은 사람의 숫자를 세어보니 여자와 어린 아이를 빼고도 오천명이나 되었습니다.(21)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생들의 참된 왕이십니다. 세상 지도자는 돈과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자기 죄 문제에 매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느라 양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 가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양들을 먹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참된 만족을 얻게 하시는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 죽은 자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희망이며 답입니다. 그러므로 없는 현실을 보고 어두운 결론에 빠질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드리며 믿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오병이어가 있었던 것처럼, 누구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시간이나 물질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말씀공부나 전도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심방과 기도의 오병이어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들고 나올 때에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주님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이번 여름수양회도 이런 믿음으로 준비할 때, 참으로 복된 생명 잔치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없는 것을 핑계대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 드림으로써 먹이시는 주님 손길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현장에 남아 오랫동안 감격의 여운을 맛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현장에서 떠나보내십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이라도 발견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 마음을 그리 다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한복음을 보면,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 정도 능력이면 로마와 붙어도 승산이 있다!’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열광하는 현장에 선 제자들도 가슴 뛰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파고드는 세상 인정과 영광의 독소를 보신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과 영광은 마약과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보이는 결과에 따라 울고 웃는 제자, 인기를 좇아가는 불나방같은 제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 서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무리들을 떠나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23)

예수님 방향대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역풍을 만나 밤바다에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신났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곤고함에 빠졌습니다. 25절을 보면 밤 사경까지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사경은 사경을 헤매는 시간, 새벽 3-6시입니다. 즉, 열 시간 넘게 칠흑같은 바다에서 시달린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커먼 바다 위로 히끄무레한 것이 제자들에게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예수님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능히 찾아오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빠져 죽을 것처럼 보이는 그곳을 은혜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심을 알고 안심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손을 번쩍 들더니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의 요청에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요청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방금전에 유령이라고 소리친 놈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있구나! 너랑 나랑 레벨이 같니?’ 창피주지 않았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몸무게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든지 중력의 법칙을 뛰어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소원있는 자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칠흑같은 어둠과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면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눈을 고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는 4복음서중에서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별로 관심두지 않고 넘어갔던 이야기를 마태가 기록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가 베드로다워질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6장에 가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고 그의 믿음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큰 역사에 주목합니다. 빵 오천 개, 물고기 오천 마리가 오가는 그런 ‘사건’이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태의 눈에는 베드로의 작은 도전이 위대한 지도자 베드로를 만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목자의 심정과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싶었고 예수님처럼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바다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걸어보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안전한 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물 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엄청난 성장, 엄청난 변화는 엄청난 도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예수님처럼 해보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 인터뷰를 들어보면 주로 같은 레퍼토리입니다. ‘수업에 충실했습니다. 예습, 복습 철저히 했습니다. 그날 그날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것이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염려에 빠뜨리고 주저앉게 만드는 생각의 파도가 불어 닥쳐올 때에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잘하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잘하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나쁘니, 경쟁이 치열하니, 시간이 없으니,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선행을 하지 않았으니 잘할 수 없다!’ 이런 저런 바람이 불어닥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편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실현 불가능해보이는 그 세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체험하고 빠지고 다시 체험하며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수많은 법칙, 수많은 가설을 끌어와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베드로도 얼마든지 물위를 걷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라’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작지만 구체적인 도전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잘 나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에 빠졌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람을 보고 두려움이 들어 믿음을 잃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며 말씀을 의지했을 때에는 중력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상황과 조건을 바라보자 사정없이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을 심으시고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모습도 은혜롭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드로를 구해주시는 예수님도 은혜롭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현실의 염려거리가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의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입니다. 이 땅의 일에 매인 마음을 끊어내고 차원높은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람을 보고 바다에 빠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빠져지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취업할 수 있을까?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생존할 수 있을까? 양들과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까? 염려의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를 두려움의 바다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코로나 바람이 복음역사에 대한 불신의 바다로 우리를 밀어 넣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다만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으며 예수님을 체험하고 베드로처럼 물에 빠졌다가 구원 받음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다시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그를 통해 복음서의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되어갔듯이, 우리 또한 영적 리더들로 성장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키우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겠습니다. 그 소원을 따라 도전하면, 하나님은 믿음의 체험을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얻게 하십니다. 우리를 복된 믿음의 사람들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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