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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8-30 (일) 10:19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25강-1.hwp (30KB) (Down: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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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25강]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2020년 마태복음 제 25 강                                                                            (최동진)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 마태복음 17:1-20
요절 /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사건과 산 밑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사건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길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길은 구원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장차 얻게 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여주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마음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변화산으로 올라가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장차 얻게 될 영광을 사모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1-13)
  1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엿새 후’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메시야의 길에 대해 말씀하신 이후부터 엿새 후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고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흘 후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은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이란 책망까지 듣고 수제자로서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져 맘고생이 더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는데 막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구나 하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3년 전으로 되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억지로 꾸역꾸역 따라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적기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산 아래에서 제자들이 보아 온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셨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인류의 메시야이신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3a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육신하시기 전에 가지셨던 본래의 모습이며, 장차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나타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을 섬기기 위해 종처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인간의 모든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시고 본래 가지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1:18) 제자들은 이런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제자의 삶은 의미 있고 보람도 있지만 힘들고 불편해서 부담스럽습니다. 고생만 할 것 같아서 자발적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하고 싶습니다. 세상 잔재미도 누리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마음으로 영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그 마음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삶을 사신 예수님, 종처럼 섬기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면 심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마음에 새겨질 때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어떤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고 승리의 확신 가운데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며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두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9장31절에는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뜻이고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본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황홀지경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무의식 중에 마음 속의 본심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훈련 받느라 굶기도 많이 했고 문제 많은 양들을 감당하느라 마음 상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산 밑에는 여전히 문제 많은 양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서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골치 아픈 세상 일이 없는 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영광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고 싶었습니다. 이를 초막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막연한 장래의 영광보다는 현재 손에 잡히는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고난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소원에 기초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생활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잠시 머물다 산 아래로 내려가야지, 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고생스럽더라도 땅에 내려와서 사명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에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b).”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뜻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자기를 부인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들어야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축복의 말씀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고 잘 듣지만 자기 부인이나 사명의 십자가, 회개, 헌신, 희생에 관한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사명의 십자가 없이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기 싫어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몸에 익힐 때만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비한 경험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영광스러운 사건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현실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며 입단속을 시키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지금 제자들이 산에서 본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면 십자가의 고난보다 부활의 영광만을 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해 오해함으로 복음 역사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한 부활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 당시 서기관들은 말라기 4장5,6절 말씀을 근거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 후에 메시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기를 기대하는 민족적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올바른 성경적 메시야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였으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야도 이미 오셨지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함으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이심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도 초막신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본래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북남미 국제수양회에 참석하고자 방향잡고 연초에 비행기 표도 끊어 놓았습니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기도로 역사를 지원하고 기도제목에서 보던 현지 양들도 만나고 선교사님들과 교제하며 쉼을 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저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 사건을 통해 삶에 많은 변화를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적당히 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성경필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늘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쓰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14-20)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4) 아이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간질병 환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귀신 들린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외아들이었습니다.(눅9:38) 그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그를 사로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귀신의 세력에 이끌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습니다. 귀신은 아이의 생명까지도 위협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모습은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고통하는 그 시대 형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이가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슬픔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고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산에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인한 섭섭한 마음과 비교의식, 열등감으로 우울하던 차에 이번 기회에 귀신을 쫓아냄으로 자기들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얼마전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위임받고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 하면서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한 경험이 있습니다.(마10:8) 그들은 이 경험에 의지해서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능히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는 두 명이 기도해도 귀신이 쫓겨났는데 이번 귀신은 강력한 변종 귀신이었는지 아홉 명이 합심하여 기도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함으로 자신들의 무능함만 드러내고 망신만 당했습니다. 그들은 왜 귀신 들린 아이 하나도 능히 고쳐주지 못했던 것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패역하다는 말은 삐뚤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 세대 전체가 불신의 세대요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 세대를 감당해야 할 지도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며 훈련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린 아이의 문제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혼란에 빠져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 충만해야 할 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하느라 영적 힘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입에서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머지않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믿음 없는 세대를 참고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진리가 외면당하고  믿음이 조롱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시고 캠퍼스에서 죄로 고통하는 양무리들의 목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문제에 얽매여 양무리들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할 때 예수님은 탄식하십니다. 저희가 불신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믿음으로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가자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b)?”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 믿음이 실제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큰 일을 위해서는 완벽한 조건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펙을 쌓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요즘에는 외모도 경쟁력이라며 외모를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 문제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도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작지만 살아있는 믿음이요 생명력이 있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도전할 때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2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 할 일이 없느니라”
  요즈음 우리 앞에는 코로나의 산이 정복할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놓여있습니다. 일상은 멈추었고 여름수양회도 취소되고 예배도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일대일도 하고 GBS도 하고 기도모임도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던 은혜와 감격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복음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올해 처음으로 규모를 축소한 온오프라인 병용 여름수양회를 갖게 하셨습니다. 처음 하는 방식이라 생소하고 과연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겨자씨와 같이 작지만 생명력 있는 알찬 수양회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강사님들을 세워주시고 신선한 메시지를 통해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으로 도전할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코로나의 산보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의 산이 더 문제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고 있는 온라인 일대일이나 여러가지 시도들이 겨자씨처럼 미약해 보이지만 믿음으로 내 마음에 있는 불신의 산을 옮기고 도전할 때  코로나를 이기고 캠퍼스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저희가 믿음의 확신 가운데 도전함으로 나와 양들의 마음에 있는 불신의 산이 옮겨지고 생명 구원의 역사가 흥왕히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에 힘쓰므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통해 진정한 영광에 이르는 삶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작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온전한 믿음을 덧입어 이 시대 병든 영혼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태산을 옮기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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