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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9-29 (일) 13:15
분 류 로마서
첨부#1 2019년_로마서1강-1.hwp (29KB)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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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1강] 복음, 하나님의 능력

2019년 로마서 제 1강                                                                  
말씀 / 로마서 1:1-17절
요절 / 로마서 1:16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쓴 편지이며,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서론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모든 편지의 처음은 자기소개와 인사로 시작합니다. 로마서에서는 1-7절입니다.  다른 편지들은 1,2절 정도로 간단히 끝내는데, 로마서는 7절에 걸쳐 아주 길게 이야기합니다. 이리저리 설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과 로마 성도들 사이에 관계성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의 양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왔다가 복음을 영접하고 돌아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생겨났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가고자 했을 때, 당연히 그들 가운데 물음표가 나왔을 것입니다. ‘바울 누구? 왜 편지하는데? 자기 동네에서나 잘하면 되지 왜 우리에게 오려고 하는데? 여기 와서 우리 피곤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로마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신뢰하며 그를 반겨 맞이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 종은 ‘말하는 가구 혹은 짐승’으로 취급받는 존재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사랑하시는 자’라는 멋지게 표현하기보다 종이라는 끔찍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주인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이리 가라 하면 가고 저리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힘들어서 못하겠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으며, 주인의 뜻이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도 가야 합니다. 유대인 바울이 민족과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방인 선교역사에 충성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 왔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내고 거기로 가려는 이유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대사로 임명받은 것’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저를 유엔대사로 임명하면, 제가 유엔에서 발언하는 모든 것들은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견해가 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바울을 사도로 임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도록 했습니다. 본래 바울의 관심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동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시대 땅 끝은 서바나였으며, 모든 길은 로마로 연결되었습니다. 바울이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려면 로마교회의 동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로마교회가 세계선교역사에 동참하려면 신령한 모임이 되어야 했고, 바울은 그를 위해 로마교회와 복음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씀한 것은 당시 로마사회에서 나름의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키지방에서 발견된 BC 9년의 비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전쟁이 그쳤으며 온 세상에 질서가 생겨났다. 그 신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은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다.’ 로마의 복음은 전쟁시대를 끝내버린 황제의 탄생이었습니다. 세상은 황제의 복음처럼 현실에서 커다란 유익을 주는 것을 복음으로 여깁니다. 수능을 보지 않아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수험생 부모들은 ‘입시 복음’으로 여길 것입니다. 경제불황이 깊으면 재테크의 복음에 열광합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성공을 부르거나 경쟁에서 앞서가는 그런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 복음을 기대하는 사람은 로마서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복음은 바울이나 바울학파가 뚝딱뚝딱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1,600여년에 걸쳐 시대가 다르고 계층이 다른 다양한 선지자들을 통해 줄기차고 일관되게 예고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구속사를 연구한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 말할 수 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메시야가 아니라 약속대로 오시는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자칭 그리스도라는 이단교주들은 주로 기적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통일교나 신천지 교주들이 별 짓을 다할지라도 메시야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 문씨 집안, 이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언된 혈통에서 태어난 것이 메시아 증거의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 죽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복음은 죽음 앞에서 휴지조각처럼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음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습니다.(4) 이는 성령으로만 가능한 역사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확신으로 말합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바울은 ‘내가’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중에서 믿어 순종케 해야 합니다!’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이 편지를 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교만과 정욕과 탐욕과 두려움과 이기심의 죄성이 있는데, 어찌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지성인이라도 아담의 불순종의 피, 가인의 반항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현실문제에 눌려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개념이 없는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은 한 세트입니다. 은혜가 있음으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있기에 나 같은 죄인들을 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때마다 우리의 기도의 들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격려하고 씨름하며 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은혜가 새로워집니다. 교만한 양들을 섬기면서 교만한 나를 깊이 발견하고, 교만한 나를 짜르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죄인들을 참고 인내하면서 나를 참고 인내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배우게 됩니다.
만약 은혜 따로, 사도의 직분 따로, 따로따로 가면 그 끝은 죽음입니다. 은혜 없는 사도의 직분은 자기 의와 교만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사도의 직분 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로 끝나버립니다. 구원의 은혜만 누리고 사명을 피해가려는 사람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연결될 때 그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이나 지금이나 지치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이방인들을 섬길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고린도전서 15:8,9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구원하여 주실 때나 지금이나 계속하여 은혜의 손길로 함께 하십니다. 나는 분별력이 없고 때로 치명적인 오류까지 범하지만, 주님은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그 역사의 열매이며, 우리의 양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로마서를 쓰는 바울의 비전입니다. 그저 모임에 나오는 양 수준으로 남아있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목자로 성장할 것을 소망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로마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가능합니다.(6)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사 이방인도 믿어 순종케 하는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로마성도들을 향한 심정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성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개척한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지원해주던 교회였거나 프로그램이 풍성한 대형교회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로마라는 도시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어떤 곳입니까!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돈이 넘쳐나서 날마다 파티를 열고 갈 데까지 가보자 즐기는 쾌락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도시에서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로마에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든지 복음역사가 가능함을 세상 만방에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8) 우리가운데에도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말공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중심을 지킬 수 있어요?’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있지요? 감동 받아야 합니다. 로마처럼 물질주의, 육신주의의 세력이 강력한 세계에서 중심을 지키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별처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가끔씩 청년 세대가 영적으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 끝이 어디일지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2019년 새내기로 대학에 들어왔다면, 나는 목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앞에 자신을 세워보면, 여기 나오는 우리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빛나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임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청년 한 사람의 믿음은 21세기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바울은 무한감사와 함께 쉬지 않고 중보기도를 합니다.(9)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서 그들을 돕고자 했습니다.(10)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믿음위에 견고하게 세우고 싶어했습니다.(11) 11절의 ‘신령한 은사’란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같은 특별한 능력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신령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선물, 곧 복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신령해지면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축복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많이 수고했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게 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수고합니다. 요셉같은 사람, 바울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렇게 성장하도록 도와주며 피차 위로받고 싶었습니다.(12) 그를 위해 여러 번 로마를 심방하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길이 막혔습니다.(13) 그렇게 길이 열리지 않자, 로마서를 보냄으로써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헬라인은 지성인 이방인, 야만인은 자연인 이방인을 말합니다. 누구 가리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에게 일만달란트 구원의 빚을 진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에게 빚을 졌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복음역사를 위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바울이 이방인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빚을 진 것 같습니다. ‘나도 할 만큼 했다. 그동안 수고한 만큼 대우받아야겠다!!’ 그런데도 바울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받은 구원의 은혜가 깊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 사랑, 양 사랑 따로 따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있고 이웃 사랑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나 홀로 마음 편하고 나 홀로 안식에 들어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 죄사함의 은혜를 주신 것은 내게 백 데나리온 빚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복음역사를 위해 수고하다가 지치고 낙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빚진 자의 심정을 잃어버리고 빚 꾸어준 자의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도 관계성의 악화를 맞이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내가 너에게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얼마인데, 너는 내게 그 정도밖에 못해?’ 반면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내가 자식 덕분에 예수님을 깊이 배우게 되었어, 네 덕분에 연단을 받고 많이 성장한 것 같아! 고마워!’ 동역자에 대해, 양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그려지는 그림이 완전히 다릅니다. 빚 진 사람이 정상이라면, 그는 빨리 갚지 못해서 미안하고 겸손해지고 조용히 듣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로마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15) ‘내가 한 수 가르쳐주겠다. 조용히 입 다물고 내 이야기를 들으라’ 자기 의로 충만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사랑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사람들’로 여기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복음의 확신을 나누고자 합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당시 시대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쉬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변방 유대지방에서 온 종교, 황제숭배 거부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저주와 수치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이상한 무리들..., 로마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큰소리를 치다가 밖에 나가면 기가 죽는 그런 상황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외칩니다.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당시 능력하면! 로마였습니다. 로마군대는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법은 모든 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로마화폐는 기축통화가 되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라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 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방황하고 고통했습니다. 넘쳐나는 풍요를 주체하지 못하고 쾌락의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한 해 2만명의 사생아들이 길거리에 버려졌고, 검투사양성소는 그들을 주워다가 검투사로 키웠습니다. 그런 검투경기를 보며 로마 시민들은 열광했습니다. 풍요와 쾌락이 광기처럼 뒤덮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내면이 병들고 가정이 무너지고 윤리와 도덕이 뒤틀려버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돈이나 권력에서 구원의 희망을 봅니다. 부자가 되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차원이 다른 인생을 살 것이라 기대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5G 세상이 오면 재미있고 꿈같은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 광고합니다. 하지만 핸폰을 바꾸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에 들어갔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그저 내가 걸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임을 우리는 그때마다 체험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는 바울이 책상에서 배운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팩트였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지금 AD 57년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박해도 많이 받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가운데에도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음란도시에 살던 고린도 사람들이 정욕을 회개하고 경건한 삶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마술과 우상의 도시 에베소 사람들은 마술책을 불태우고 악령과 우상숭배에서 떠났습니다. 운명주의에서 일어나 개척하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에게 임한 복음의 능력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그는 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훌륭한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골수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섬기는 목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시아인, 유럽인, 민족을 뛰어넘어 세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합니다. 세리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사마리아여인처럼 목마른 사람이 주님만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에베소, 고린도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복음은 죄사함을 주고 가치관을 바꾸며 인생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고 가정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는 바울에게 이루어진 역사이며 우리들에게 이루어가시는 역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성도들에게 이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주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성도들은 바울보다 바울의 전하는 복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나타났다’는 것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고자 합니까! 내가 간절히 기도했던 것들이 이루어질 때, ‘역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 찬양합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숨어 계십니까!’ 탄식합니다. 구약시대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진짜 악한 바벨론 군대를 통해 조금 덜 악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바벨론도 심판하시고 세상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보이지 않을지라도, 더딜지라도, 자기 생전에 보지 못할지라도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그러자 하박국은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고자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공의로우시고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불신에 빠지지 아니하고 선지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거짓과 반역을 반복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당신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창조부터 구원까지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우리 인간들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또한 복음은 죄인들을 향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은 어떠한 죄인이든지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로마서5: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려주기를 원했던 복음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 우리도 복음의 능력을 새롭게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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