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1-19 (일) 12:48
분 류 로마서
첨부#1 2019년_로마서_제12강-1.hwp (28KB) (Down:18)
ㆍ추천: 0  ㆍ조회: 298      
IP: 175.xxx.122
[2020년 로마서 제12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2020년 로마서 제12강
말씀 / 로마서 9:1-29절
요절 / 로마서 9:16절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 편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긍휼과 주권 편에서 문제를 바라보려면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 편에서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큰 근심이란 사랑하는 가족이 중병에 걸린 것 같은 근심을 말합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지속적으로 힘들고 아픈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근심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이방인들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날마다 숫자가 늘어가는 데, 동족 유대인들은 자기 의와 교만으로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3) 바울은 ‘동족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심판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족에게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단순한 민족감정만으로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8가지 사랑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 되었던 자들을 건져내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과 시내산 강림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심 갖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사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알게 하고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알게 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함으로써 매번 만나주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 메시야를 보내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시련을 이길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다. 또한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주셨습니다.(5) 그를 통해 믿음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이드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면 당연히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의 원수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까!(6)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혈통을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핏줄로 태어난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삭 한 사람만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7)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을 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8.9)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를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가 쌍둥이를 가졌을 때였습니다.(10) 아직 그 자녀들이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하나님은 엄마 뱃속에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11) 이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아기를 낳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했습니다.(12) 야곱이 에서보다 요리를 잘하여, 엄마에 대한 효도심이 특별하여, 머리가 좋아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 1:2,3절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13)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택함받는 것이며, 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택함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14)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의 원리가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출애굽기 33:19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아 시내산까지 왔는데도 그런 짓을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제시한 목표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이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의를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보다 잘하는 한두 가지 장점을 내세워 ‘하나님이 나의 그런 점을 귀하게 보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닐까?’ 구원의 근거로 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는 오십 보 백보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아무 할 말 없는 죄인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름의 행위나 자격을 의의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나 안식일 준수를 경건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합니다. 심성이나 매너에 따라, 교육정도에 따라, 종교적인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에 따라 평가할지라도 진정으로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아 긍정의 기질을 일찍부터 발전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매너도 좋고 율법도 잘 지킵니다. 반면 힘들게 자라다보니 시크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책을 읽고 있으면 핍박을 받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성경책을 읽고 소감을 써야만 핍박을 당하지 않는, 강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주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각각의 보여주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행위나 자격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기에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자들이기에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큰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 종신토록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을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허물과 실수를 반복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어제까지 천사처럼 하늘을 날았을지라도 오늘 땅속으로 추락할 수 있는 죄성을 가졌습니다. 자격을 따진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부족할지라도 은혜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새로운 심령으로 양들과 복음역사를 섬깁니다. 우리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해지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놓쳐버리고 자격과 조건을 따지고 있을 때입니다. 반면 주님의 긍휼을 붙들고 의지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풍성한 은혜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다만 어떤 이는 순종함으로, 어떤 이는 완악함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17) 흔히 ‘내가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내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라는 말을 잘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먹을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선과 악, 인간의 성공과 실패 위에서 당신의 손길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십니다.(18)

그러자 혹 어떤 이들이 바울을 향해 의문을 제기합니다.(19) “하나님의 손길 아래 결과적으로 바로가 완악해졌다면, 하나님이 완악한 바로를 심판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 아닌가요?” 바울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20,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변론,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어느 정도, 몇 %나 영향력을 미치는지, 하나님의 책임과 인간의 책임을 어느 정도로 나누어야 하는지, 그런 신학적인 변론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라고 반문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생각 그 자체를 문제시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원의 세계에 거하시며, 우리는 지극히 좁은 3차원의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그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추측할 수도 없음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의식의 출발선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섭리를 체험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신으로 빠져버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눈을 뜨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출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지었습니까? 항의하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토기장이여 내 옆에 있던 진흙으로는 예쁜 커피잔을 만들었으면서 나는 왜 이리도 거친 뚝배기로 만들었습니까!’, 자기편에서 보면 억울하고 화가 날지 모르지만, 토기장이 편에서 보면 커피잔도 필요하고 뚝배기도 필요합니다. 각각의 그릇이 다 소중하고 저마다 필요한 용도가 있습니다. 세상의 처음과 끝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오묘한 지혜로 각각의 그릇들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은 당장 눈앞의 결과를 가지고 성공이냐 실패냐, 선함이냐, 악함이냐, 결론을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실패처럼 보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을 열기도 하시고 인간의 악함을 통해 더 큰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어떻게 나를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까!’ 따지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처지가 감옥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들이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천한 그릇으로 사용됩니다.

바로의 완악함도 그러합니다. 출애굽기의 바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열가지 재앙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바로의 마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바로의 완악함으로 인해 열가지 재앙이 내려졌는데, 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했을 때, 애굽의 많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따라 함께 출애굽했습니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의 완악함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 당장에는 비극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자기의가 없는 이방인들이 복음역사의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할례를 해야 되느냐,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이런 중요하지 않는 논쟁에 붙잡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분명히 붙잡습니다. 결과적으로 온 세상 만민을 향해 복음을 힘 있게 전파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놔두심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려는데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사람들은 악인을 보면 어서 빨리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늘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 기도실에 올라가 간절히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 때문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기도 중에 한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래, 힘들겠지. 그런데 너를 평생 참고 있는 나는 얼마나 힘들겠느냐! 나도 언제까지 너를 참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저 사람은 빨리 망해야 해! 사라졌으면 좋겠어!’ 하나님에게 이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참고 또 참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반면 영광을 주기로 택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십니다.(23)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주권신앙은 ‘하나님의 정한 대로 다 될 터이니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운명주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이 아니라 희망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얼마든지 새 역사가 가능하다’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갖고 경험이나 계산을 뛰어넘어 심정으로 기도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면 누구든지 변화를 받아 새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서홍일 목자는 저의 대학동기이면서 같은 하숙집 방 친구였습니다. 당시 이 분은 단전호흡을 하며  고고한 삶을 추구하였기에, 절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으며 도사로 사는 것이 어울린다고 확신했습니다. 대학 1학년, 그는 일대일 목자의 심방을 받으면 화장실로 혹은 옥상으로 숨었고, 하숙집 동료들에게 ‘집에 없다’라고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내가 UBF목자가 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손에 장을 지져야 하지만, 아직도 안 지지고 있습니다. 그때 홍일형제를 찾아온 선배를 향해 ‘집에 없어요. 원치 않는 사람 그리 괴롭히지 마세요’ 째려보며 거짓을 말했던 개념 없는 악한 동무가 바로 저였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희망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드립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사람의 말이 아닌 성경으로 공부하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지금은 완악하고 배척하여 전혀 사랑스럽지 않을지라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희망하며 씨름하고 감당하며 섬깁니다. 어둡고 암울하게 보이는 시대일지라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에 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긍휼의 그릇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남겨주신 사람들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 원리는 이방인이나 유대인, 신약시대나 구약시대에나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는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 백성 삼는 역사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25) 이방 세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증거했습니다.(26)
이사야 선지자는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라고 현실적인 아픔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대부분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무관심하고 무능하고 무정한 분으로 생각하여 여호와 신앙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반면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믿음위에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하 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28)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그 믿음위에 남아있도록 보존해주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이미 소돔과 같고 고모라 같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29) 하나님은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남기사 유대와 사마리아에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 바울을 남기심으로 이방인 가운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남은 자들은 소수였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또 다른 남은 자들을 세우고 줄기차게 당신의 백성들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크리스천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졌습니다. 그럴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신 주권을 부정하는 소리가 세상에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대며 귀를 막고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음란해지고 세상이 치열해질수록 더더욱 그런 소리는 커져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보스럽고 두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흐름대로 자신을 맡기며 자기의와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을 믿는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강해서도 아니요 세상을 이길 나름의 비법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남은 자들을 통해 새 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2020년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보내어주시고 믿음의 자리에 세우실 지 기대가 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캠퍼스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남은 자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름아이콘 조영숙
2020-02-20 19:59
회원캐릭터
남은 자    거룩한 그루터기 .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을  믿는  그자리에  서게 됩니다  "
로마서를 마치는 시점에서 다시 읽고 은헤 받게 됩니다      로마서 강의중 나의 pick 메시지 입니다  !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64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3강]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0-05-31 13
64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관리자 2020-05-24 76
642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1강]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관리자 2020-05-17 84
64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0강]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관리자 2020-05-10 119
64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9강]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관리자 2020-05-03 110
63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8강]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 관리자 2020-04-26 107
638 마태복음 [2020년 부활절 특강]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관리자 2020-04-19 114
637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7강]너희도 온전하라 휴화산 2020-04-12 138
636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6강]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휴화산 2020-04-05 151
63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5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관리자 2020-03-29 179
63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4강]다만 그를 섬기라 관리자 2020-03-22 166
63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관리자 2020-03-15 170
632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9강] 복음의 동역자들 관리자 2020-03-08 195
631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8강]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관리자 2020-03-01 195
630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7강] 서로 받으라 관리자 2020-02-23 219
629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6강] 빛의 갑옷을 입자 관리자 2020-02-16 194
628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5강]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관리자 2020-02-09 200
627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4강] 하나님의 구원 계획 관리자 2020-02-02 216
626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3강]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관리자 2020-01-26 246
625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2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1] 관리자 2020-01-19 298
12345678910,,,33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