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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휴화산
작성일 2020-04-12 (일) 12:30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7강-1.hwp (29KB) (Down: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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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7강]너희도 온전하라
2020년 마태복음 제 7 강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선거주간입니다. 국회의원들의 유세를 듣다보면 지역 현안이나 경제 위기는 금방 해결되고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훨씬 살만한 세상으로 확실히 도약할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의 공약이 지킬 수 없는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지는 공공의 약속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읽다보면, ‘과연 지킬 수 있는 말씀인가!’, 현기증이 난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이 공허한 말씀, 공언이 아니라 공공의 말씀이 되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차원 높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고 말씀에 합당한 온전한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도 고치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율법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성경은 율법과 심판을 강조하는 것 같고 신약성경은 은혜와 긍휼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단들이 파고드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단들은 구약의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지금도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이단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본질을 드러내고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일까? 정결의식이나 절기들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담긴 본질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율법이 해낼 수 없었던 구원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과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거나 무시 받아도 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18) 당시 랍비들은 신명기 22:6,7절, 새의 둥지에서 어미새는 잡아가지 말고 새끼새만 잡아가라는 계명을 제일 작은 계명으로 가르쳤습니다. 어미 새가 죽든지, 새끼 새가 죽든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극히 작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작은 계명이라며 버리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취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19) 이는 계명을 피상적으로만 보았을 뿐,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모세오경을 암송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수준은 어떠했습니까!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기는커녕 건수만 생기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게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갖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살인, 간음, 맹세, 원수사랑의 네 가지 계명을 통해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살인하지 말라. 2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살인하지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계명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앞에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았습니다. ‘착한 자를 살인하지 말라, 동족을 살인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냥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생명이 절대적으로 소중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원자로 보내신 이유도 그러합니다. ‘똑똑하니까, 의인이니까, 일을 잘할 같으니까’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지만 않는다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나는 살인자같은 흉악한 죄인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 골빈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십니다.(22) 말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살인죄와 동등하게 올려놓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이 칼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협박하고 소송하는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무시하고 비웃는 언어폭력이 평생의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문제의식을 접어버릴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겼느냐, 어기지 않았느냐만을 따지기보다 내 입술과 내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문제의식 없이 내뱉는 말들이 다른 이들의 영혼을 좀비처럼 거칠고 사나운 영혼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사를 stop하라고 하십니다.(23)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24) 가장 먼저 갈등과 상처를 해결하기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만일 자기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다면,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뒤로 미루지 말고 급히 사화해야 합니다.(25) 마치 살인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탕감받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이 ‘나는 기도했으니까 용서받을거야’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찾아가서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고 선처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지금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매달릴 것입니다. 그 후에 기도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작은 상처와 갈등을 일으킨 것을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칼을 들지 않을지라도 타인의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지배해야 할 영적 공동체에 갈등과 미움을 끌어오고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26)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크게 생각하는 거기에서 생명이 자라는 역사가 힘있게 일어납니다.

 둘째, 간음과 이혼에 대한 계명입니다.(27). 간음이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간음을 행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간음은 하나님앞에서의 약속을 깨고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간음죄를 사형으로 다루었는데도 심각한 이혼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는 법을 지켰지만 마음을 음욕으로부터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욕이란 배우자가 아닌 사람을 마음에 품고 즐기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능력 많은 사람, 젠틀하고 매너가 좋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거기에서부터 가정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항상 신혼처럼 살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젊음은 사라지고 신혼 시절의 콩깍지는 벗겨지고 있는 모습, 없는 모습 다 보게 됩니다. 탐나는 사람을 품고 즐기는 정욕에 마음 한 구석을 내어주면 바이러스에 걸린 육체처럼 병든 영혼, 병든 가정생활로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28)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족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n번방 사건은 무시무시한 성범죄마저도 온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합리화를 거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보기만 했다, 나는 자주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다.’ 어디까지 처벌해야 하는가? 법적으로 논란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지키는 싸움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만일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몸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십니다. 만약 오른손으로 말미암아 유혹에 빠지게 된다면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30) 차라리 손이 없어질지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입니까! 정욕을 품는 것을 커피 한잔 마시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생명이 걸려있는 절박한 싸움으로 알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싸움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눈을 빼어내고 손을 찍어낼만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인터넷이 죄를 범하게 하면 가위로 마우스를 짤라 버리고 컴퓨터 하드를 포맷시켜 버릴만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핸드폰을 통해 유혹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법으로는 음란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간음을 사형으로 다루었지만, 심각한 이혼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주라고 했습니다.(31) 사회적 약자였던 여인에게 이혼녀라는 법적 증서가 없으면 2차, 3차 피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2절을 보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배우자를 버리면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줌으로써 합법적으로 정욕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와 살다가 싫증이 나면 이런 저런 이유로 트집을 잡아 이혼증서를 써주고 다른 여자와 결혼합니다. 이혼증서를 써주었으니 문제있는 남자가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킨 남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이혼 증서 써주고 다른 여자로 바꿉니다. 그러면 간음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혼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건강한 가정은 점점 사라지고 병든 가정은 점점 많아집니다. 법을 어기지 않는 싸움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는 싸움이 가정을 지키고 건강한 사회의 기초가 됩니다.

셋째, 맹세에 대한 계명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당시 바리새인들은 헛맹세를 하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헛맹세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저들은 헛맹세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하늘을 걸고 맹세했습니다.(34) 혹은 땅을 걸고, 혹은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했습니다.(35) 그런 맹세가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했습니다.(36) 평소 신뢰감을 주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강하게 맹세했을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내 성을 간다”, “내가 이번 달까지 지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 개XX다” 율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의 신용을 끌어내기 위해 강력한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신용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하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다가 손해볼 수 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하다가 따돌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길을 가다보면 참된 신용을 쌓게 됩니다. 정보통신시대가 되면서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너무도 빠른 시간에 교차하다보니 무엇이 옳은 정보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말들만 들으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내뱉고 책임지지 않는 가짜뉴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묘한 말, 책임을 피해가는 말, 당장의 유익을 구하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갈지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말의 신용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함부로 허언을 하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옳을 것을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믿을만한 사람, 우리 공동체를 믿을만한 모임으로 세워가는 길입니다.

넷째, 보복과 원수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레위기 24:20절에는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동해보복법이라고 합니다. 피해자들이 지나치게 보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명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 상처와 고통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치아 한 개 부러지면 상대방의 치아를 모조리 부러뜨려야 속이 풀리는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치아가 아닌 머리를 박살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계명이 반드시 복수를 하라는 계명처럼 들리는 것도 당한 대로 되돌려주고 싶은 복수의 본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이 계명의 본질은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정확한 보상만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가 어렵습니다. 이에는 이라는 계명대로 ‘내 치아 하나 부러졌으니, 당신 치아 하나 부러뜨린거야!’ 실행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나 상대방이나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내 하얀 치아랑 당신 누런 이빨이랑 어떻게 같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9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비결은 정확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줄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십니다.(40) 나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41) 당시 로마군인들은 식민지 백성에 대해 강제로 5리까지 동행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끌고 가는 로마놈들에게 얼마나 따지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왕 동행할 바에는 10리까지도 동행해주려는 마음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나에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42) 정확하게 따지기보다 손해보고 희생함으로 사람 마음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디까지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당시 유대사회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실은 이런 계명은 없습니다. 레위기 19:18절 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말씀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응징하라는 계명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고상한 유대인과 더럽고 추한 죄인들로 나누어 관용하고 희생해야 할 대상과 그러지 말고 단호하게 응징해야 할 대상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는 레위기 19:18절 계명의 온전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해야 할 사람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나누어 적용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웃과 원수를 나누고, 원수에 대한 미움을 당연시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원수지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 원수 폴더로 이동시켜 원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수들은 나의 무관심과 미움을 합리화하는 도피처가 되어버립니다. ‘원수같은 놈인데 나라고 뭘 어쩔 수 있겠어!’ 영적 피드백을 막아버립니다.
레위기 19:18절 계명의 핵심은 형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와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과정에는 항상 위기가 있습니다. 이웃으로 생각하고 진심을 쏟아 부었는데 알면 알수록 이웃답지 않고 웬쑤같은 모습을 볼 때입니다. 때로는 동역자가, 때로는 자녀가, 때로는 양들이 웬쑤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도 원망하지 말고 견책하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근육운동과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랑의 범위를 점점 줄여가면 쓰지 않는 근육처럼 사랑의 능력치 또한 줄어들게 됩니다. 반면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수록 사랑의 근육이 점점 발달하여 점점 고차원적인 사랑의 레벨로 올라갑니다. 원수같은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 도달하게 됩니다.(45) 하나님은 햇볕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46) 세리들도 자기 사람들만큼은 끔찍이 챙깁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하는 것이 없습니다.(47) 이방인들도 그 정도는 끝내주게 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아픔과 고통을 준 자들까지도 사랑하고자 몸부림을 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 같은 악인, 나같이 불의한 자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놓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멸시와 죽음의 고통가운데에서도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본문을 주석해놓은 책들 중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온전할 수 있는가? 답: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불가능한 임무, 미션 임파서블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놀랍게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에 대해 온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청년을 기억하십니까?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특별한 것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계명을 지키라”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키었습니다.” 사람 죽이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계명을 지켰다는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켰으나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시작으로 원수 사랑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죽이지 않은 것으로 다 이루었다며 끝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지 않는 계명은 아무리 열심히 지킬지라도 천국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갖는 것은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족하지 않고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적용해보면 타인의 고통을 크게 생각하고 배우자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누군가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구원을 받은 자녀들이라면 지극히 당연하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며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특별한 길이 아니라 누구나 가야 할 당연한 길입니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마땅히 가야할 길이 특별한 길처럼 보이고 지극히 당연한 길이 하늘 길을 걷는 것처럼 차원 높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에 끊임없이 빛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둠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로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말씀이 하늘 아버지의 온전한 마음을 알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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