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5-10 (일) 12:35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10강-1.hwp (29KB) (Down:14)
ㆍ추천: 0  ㆍ조회: 120      
IP: 61.xxx.145
[2020년 마태복음 제10강]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2020년 마태복음 10강  
말씀 / 마태복음 7:1-12절
요절 / 마태복음 7:12절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천국을 맛보기도 하고 지옥을 맛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소유의 해법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입니다.  부모에게서, 자녀에게서, 동역자에게서, 목자와 양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고 싶나요? 그 마음으로 먼저 상대방을 대접하면 천국이 우리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이시간 말씀을 통해 대접하기에 합당한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비판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1) ‘비판’이란 헬라어 ‘크리노’는 ‘재판정에서 내리는 판결’ 혹은 ‘하나님의 심판대앞에서 내려지는 선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비판은 재판관처럼,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확정적으로 내려지는 사람에 대한 평가입니다. ‘당신은 이기적인 죄인, 당신은 안일한 죄인...’, 어떤 비판은 자아성찰의 통로가 될 수 있고 발전을 위한 자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기능을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비판은 관계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 자기가 옳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명감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영적 권면으로 듣기보다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로 오랜 시간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가끔 관계성이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기억나지 않은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자님,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세요?’, 저는  기억하지 못했던 오래전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기억보다도 당시에는 씁쓸했던 기억들입니다. 지금 관계성이 좋기에 그나마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비판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진실을 갈수록 깨닫습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다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다가 막상 돌직구같은 비판을 당하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비판당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온 신경이 곤두서고 화가 납니다. 비판은 옳고 그름을 떠나 또다른 비판을 불러옵니다. 탁구공을 세게 치면 더 강하게 되돌아오듯이, 강한 비판은 강한 갈등, 상처, 싸움을 만들어냅니다. 결과적으로 덕을 세우기보다 다툼과 분열을 만들고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비판은 타인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남을 비판하다보면 타인을 불신하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고 있으니, 남도 나를 비판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람 말에 예민해지게 됩니다. 비판은 코로나 바이러스같은 전염력을 갖고 있습니다. 비판의 소리가 많으면 모임이 발전할 것 같지만, 연약하고 어긋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면 긍정의 이야기가 훨씬 더 좋습니다. 사람의 부족함을 메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긍정의 관점에서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모임, 은혜로운 사람을 통해 긍휼의 손길로 역사하십니다.

둘째, 제대로 된 비판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인을 용감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의 판단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관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익숙한 것, 자기 기질에 맞는 것을 좋게 보고,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는 것,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것을 나쁘게 보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김인중 목사가 쓴 “안산 동산고 이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성적인 학생은 생각을 진지하게 해서 좋습니다. 사교성이 적은 학생은 정직하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습니다. 소심한 학생은 실수가 적고 정확해서 좋습니다.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의욕이 넘쳐서 좋습니다. 말이 많은 학생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겸손해서 좋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꿍꿍이가 많고 사교성이 적은 학생은 자기 세계에 빠져 있고 소심한 학생은 연약하고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욕심꾸러기이며 말이 많은 학생은 가볍고 깊이가 없으며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능력이 없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우리의 시각은 자기 경험, 자기 기질, 자기 상식에 맞추어 기울어져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균형을 잡아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가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랴 하겠느냐” ‘들보’는 집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큰 나무입니다. 티는 들보를 만들 때의 톱밥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먼지입니다. 그와 같이 상대방의 허물에 대해서는 티와 같이 가볍게 생각하고 나의 문제에 대해서는 들보처럼 크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과장된 비유가 아닙니까!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실제 우리의 관점에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사람의 깊은 속사정의 일부, 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허물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좋은 의도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그것의 일부만 보고  오해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눈에 티가 들어있는데, 핀셋이나 뺀지 들고 뽑아내겠다고 덤비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티가 아니라 눈을 뽑아낼 것입니다. 후 하고 불거나 안약을 넣어도 되지만, 대부분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으면 눈물을 타고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상대방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반면,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는 내면 깊숙이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 속에 들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중심성이라는 커다란 들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그때 그 시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로 살고 있는 오늘 지금도 그러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성의 들보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으면서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허물을 용서할 수 없는 인색함과 냉랭함이 있습니다. 미움과 상처의 가시를 영혼 깊숙이 새겨놓고 차가운 심장으로 살아가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히 들여다보면 들보같은 커다란 죄성이 박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여! 혹은 형제들이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도 예외 없이 밖을 향하여는 엄격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관대한 성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돕고자 하는 자마다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고난 당한 욥을 위문하러 왔다가 고문했습니다. 현재 고난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 대해 욥보다 문제없고 욥보다 의롭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도우려면 자기를 깊이 성찰하여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욕심이나 정욕이나 교만의 들보가 있는지 돌아보고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형제를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자기안에 있는 들보를 빼어내고 상대방을 돕고자 최선을 다할지라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심을 밟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양이 아니라 ‘개와 돼지’라고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많은 유익을 줍니까! 그런데도 배우기는커녕 세상 욕심에 기초하여 분을 품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수한 열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정욕을 채우는 자들도 있습니다. 신천지처럼 몰래 성도사이에 파고들어 이간질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역사에 큰 해악을 끼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제대로 분별하여 조심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인지, 개와 돼지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까! 지금 목자에게 상처를 준다고 하여 함부로 개와 돼지라고 단정을 내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 누구나 개와 돼지같은 악한 본성을 가졌습니다. 목자의 전한 복음을 비웃고 정욕을 좇아가고 교만을 뿜어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던 자들이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역사를 봅니다. 바울처럼 원수노릇 하다가 열정적인 복음의 일군으로 변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고 변화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기 문제를 들보처럼 여기고, 어떻게 상대방의 허물을 티처럼 여길 수 있으며, 어떻게 양과 개 돼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7-11절에 걸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이 말씀은 고대 거지들의 좌우명으로 유행했다고 합니다. ‘문전박대를 당할지라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구걸하면 결국에는 얻어먹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이나 보험회사 영업사원의 요절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향해 두드리는 것인지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그래, 옛다 이빨이나 망가져라’하며 돌을 던져주는 부모는 없습니다.(9)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옛다, 생선 대신 뱀이나 먹어라’ 던져줄 아버지도 없습니다.(10)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떡을 달라 하면 아이스크림 케익을 주고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면 비싼 뱀장어를 사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11)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합격, 장학금, 직장, 결혼, 집, 부자, 건강, 양, 제자, 받고 싶은 것,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1-6절 말씀과 연결시켜 본다면 비판을 하지 않으면서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심정, 영적 분별력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다고 하여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에 능숙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저는 목자로서 사람을 이해하는데 느리고 소통에 능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인해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진 것과 그런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오가며 파국을 맞이하기도 하고 마땅히 분별해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해 두고두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누구나 뼈아픈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그 관계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지속적인 기도생활이 필요합니다. 상처나 쓴뿌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발견하기까지 찾고 찾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와 성장을 위해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 본성은 비판하기에 익숙하고 비난받는 자리에 서기는 죽기처럼 싫어합니다.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면, 이해심도 없고 속이 좁은 나의 들보같은 문제로 보기보다도 ‘저 사람이 문제야’로 떠넘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손길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간절하고도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상처와 냉소로 가득한 영혼에게 사랑을 부어 주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사랑하게 하십니다. 어둠과 실패만 있는 것 같은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의 문을 열게 하십니다. 그를 통해 남을 대접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로마 황제였던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이 말씀을 궁전의 벽에 금으로 새겨놓았습니다. 그래서 황금률(golden rule)이라 불립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이는 평생 고민해야 할 주제입니다. 어떻게 대접했느냐에 따라 평생의 원수를 만들기도 하고 평생의 친구로 삼기도 합니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악마가 한 여인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이런 말을 전합니다. “남편은 죽으면서 참회할 것이 많다고 하면서, 죽기 전에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슬퍼하던 아내는 남편의 말에 감동되었습니다. “용서요? 용서하고말고요. 그 사람은 마음이 착했답니다.” 그러자 악마가 그 본성을 발동하여 다시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했지요. 하늘도 아는 것인데, 사실은 나보다 마누라가 더 나빴다고.” 그러자 그의 아내가 화를 내며 남편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요? 죽어가면서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빌어먹을 인간, 참 잘 죽었지!”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분노합니다. 우리 시대 많은 청년들이 공정이라는 원리에 예민합니다. 어느 세대보다 능력이 많은데도 성공의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 현실이 큰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청년세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니 내가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에 앉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리 대접받지 못할 것 같자, 서로 누가 크냐 다투며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대접받는 것에 민감한 우리들에게 그 마음으로 먼저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어떻게 대접받고 싶습니까? 저는 주일 저녁 메시지를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아무리 엉터리로 전하는 날이었다 할지라도 ‘목자님, 수고하셨어요. 정말 은혜로운 메시지였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으로 동역자를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모님, 수고하셨어요. 정말 은혜로운 저녁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으로 내가 그 사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깊은 신뢰의 관계가 맺어질 것입니다. 조금 섬기고 많이 인정받습니까! 그 마음으로 조금 섬긴 사람을 많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실수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그거 별거 아니에요. 사람이 다 그런 거지요’ 위로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의 좋은 동역자가 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대접받았기에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대접받기 원하는 그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차갑게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좀 따뜻하게 말해주면 안될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따뜻하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에 담긴 성경의 원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대접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너무나 신비하고 아름답고 오묘합니다. 이는 연약한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창조해 놓으신 세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먼저 구원자를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친히 구원자 모세를 보내시고 강한 팔로 열 재앙을 내리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끝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투덜할 때에도 하나님은 만나를 먹이시고 마실 물을 주시며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높이고 경배하는 이유, 우리를 자녀로 대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으로 먼저 대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복음의 비밀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혈통이 좋아서, 다른 민족과 달리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켜서 그렇게 대접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기의에 빠진 유대인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온갖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율법서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먼저 대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택함받은 것은 그들의 특별함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을 자녀로 대접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먼저 대접해 주셨기에 수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그들 또한 다른 민족을 향해 은혜 베푸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했던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처럼, 그들 또한 율법을 모르는 백성에게 율법을 비추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실제로 알아가는 것,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모임으로 세울 수 있는 원리입니다.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큰 힘은 비판이나 쓴 소리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 부족하여 은혜가 딸리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대접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대부분 ‘나를 대접하는 것만큼 나도 대접하겠다’는 마음 정도입니다. 그런 마음은 이상하게도 스피릿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손해의식이나 상처, 비판과 정죄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계산하는 것이 그 마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섬김 받고 싶은 그 마음으로 내가 먼저 심기기에  힘써야 합니다. 칭찬받고 싶은 만큼 내가 먼저 칭찬하고 격려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는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기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공격하기보다 사랑으로 감싸안는 것, 내가 먼저 나아가고 내가 먼저 감당하는 것,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범하게도 그 길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창세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소망두셨던 그런 사람, 그런 모임으로 성장해가기를 기도합니다.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64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3강]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0-05-31 13
64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관리자 2020-05-24 76
642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1강]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관리자 2020-05-17 85
64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0강]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관리자 2020-05-10 120
64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9강]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관리자 2020-05-03 110
63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8강]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 관리자 2020-04-26 107
638 마태복음 [2020년 부활절 특강]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관리자 2020-04-19 114
637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7강]너희도 온전하라 휴화산 2020-04-12 138
636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6강]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휴화산 2020-04-05 151
63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5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관리자 2020-03-29 179
63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4강]다만 그를 섬기라 관리자 2020-03-22 166
63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관리자 2020-03-15 170
632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9강] 복음의 동역자들 관리자 2020-03-08 195
631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8강]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관리자 2020-03-01 195
630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7강] 서로 받으라 관리자 2020-02-23 219
629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6강] 빛의 갑옷을 입자 관리자 2020-02-16 194
628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5강]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관리자 2020-02-09 200
627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4강] 하나님의 구원 계획 관리자 2020-02-02 216
626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3강]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관리자 2020-01-26 246
625 로마서 [2020년 로마서 제12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1] 관리자 2020-01-19 298
12345678910,,,33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