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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휴화산
작성일 2021-03-06 (토) 19:31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21년_요한복음1강-1.hwp (29KB) (Down: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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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1강]말씀이 육신이 되어
2021년 요한복음 제 1 강                                                                                                   오정훈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AD 90-100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공관복음(The synoptic gospels)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 승천까지 순서적으로 기록함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한 후에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제 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사도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20장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1차적인 목적은 불신자들이 아닌 신자들을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이 연약해서 복음에 담긴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자들, 신앙이 견고하지 못해 고난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신자들, 박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두더지처럼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밝히 알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해지고 신앙이 성장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잘 알아야 합니다. 이번 봄 학기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깊이 배우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빛과 사랑으로 충만해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천지를 창조하던 때보다 앞선 곧 영원 전을 가리킵니다. 이는 ‘계시니라’는 말씀이 우리말에는 없는 에이미(ειμι) 동사의 미완료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원 전부터 계속 말씀이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 곧 로고스로 나타낸 예수님의 선재성과 신성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이 창조 전부터 계시던 신적인 존재이시며 만물의 기원자 (originator)요, 창시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는 헬라어 ‘프로스(προσ)’로서 ‘~를 향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말씀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말씀의 계시와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 많은 도마도 요한복음20장 28절에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말씀 곧 로고스로 표현한 것일까요? 헬라어로 ‘로고스(λογοσ)’는 ‘말씀’이란 뜻 외에 ‘이성’, ‘논리’, ‘계시’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태초에 만물을 존재케 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를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로고스’는 인격적인 실체가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말씀’은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능력과 지혜를 가진 인격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풍성히 누렸습니다. 시편 107편 20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십계명이 쓰인 두 돌판이었습니다. 두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를 보면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곧 하나님 자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두신 뜻이 무엇이고 그 능력이 어떠한지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는 말씀을 통한,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말씀이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요한은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그 로고스가 예수님이시며, 유대인들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뜻을 알게 됨을 알려주고자 예수님을 말씀 곧 로고스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모든 에너지의 근원인 빛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공중에 나는 새 어느 하나도 말씀 없이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선한 뜻과 계획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섭리의 인생, 빛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4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동일하지만 가사적인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아파도 병들고 무기력해지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아 슬프고 연약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생명은 기쁨과 행복과 힘이 넘치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런 생명력을 덧입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자기를 가꿉니다. 여행을 하고 맛집을 다니고 게임을 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여러 문제로 인해 무기력해지고 절망에 빠지며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 됩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하고 애굽의 바로는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자신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어서 넣어두었지만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부패했고 그들이 누리던 부귀영화는 죽음과 함께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오직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과 빛은 요한복음에서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마음에 짙게 깔려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됩니다. 세상은 밝은 것 같지만 생명이 없기 때문에 어둡습니다. 사람들은 인생 목적과 의미를 몰라서 방황하고, 허무와 운명주의로 무기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인생들의 어두운 내면을 밝히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모든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빛이 임하듯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인 사람이라도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밝고 환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박그레이스 사모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얼굴이 늘 어두웠습니다. 입에서는 쉬지 않고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한숨대신 찬송이 흘러나오고 해처럼 빛난 얼굴이 되었습니다. 어둡고 기쁨이 없는 우리 인생 가운데 생명의 빛을 비추사 밝고 환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다’는 말은 ‘깨닫다’와 ‘이기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과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을 모두 갖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의미하고 고의로 빛을 배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시대부터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지만 택한 백성들은 그들을 배척하였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빛 되신 예수님께 인도할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증거자로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6-8) 9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참 빛’은 불완전한 빛에 대하여 완전한 빛을 가리킵니다. 이 빛은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두움을 밝혀 몰아내고 생명을 주는 완전한 빛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을 비추는 여러 가지 빛이 있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현자들이 윤리의 빛, 이성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결혼은 하고 보라. 착한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요,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이 소크라테스의 말이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빛이 될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두운 동굴을 비추는 불빛과 같았지만 완전한 빛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마음에 빛이 없습니다. 요즘 비대면 온라인 수업만 듣는 대학생들 가운데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고려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에 장래에 대한 비젼이나 꿈이 사라져 미래가 암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두운 세상에 코로나 백신이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내 집이라도 마련한다면 빛을 얻게 될까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어둠을 물리쳐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밝히고 절망을 물리쳐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참 빛 되신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이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새롭게 임하므로 코로나 시대의 모든 어두움을 이기고 새로운 희망과 비젼을 덧입게 은혜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0,11절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렇다 쳐도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마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배척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런 악한 세상을 보면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13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영접이란 단어는 가정에 손님이 올 때 안으로 모셔 들여 대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접하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전 존재를 믿는 것이요 지식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통해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권세’는 권위(authority)나 권리(right)를 뜻하는 것으로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알프스 산맥이 아름다운 스위스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방법은 4억5천 만원 정도의 세금을 매년 일시불로 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정말 재벌가의 금수저로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금수저의 좋은 혈통을 타고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육정 곧 그 사람의 피나는 노력으로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사람의 뜻, 곧 남편의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전적인 은혜의 역사요 긍휼의 역사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지금도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혈통으로나 출신으로 봐도 아무런 꼬투리도 없는 우리를 그 이름을 영접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14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것은 성육신을 가리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한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독생자의 한없는 낮아지심과 자기 비우심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낮아지실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은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 장막 가운데 계신 것과 같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끼리끼리 모이는 법인데 자기와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독생자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낮추실 뿐 아니라 냄새나는 죄인들, 문제 많은 제자들과 동고동락 하셨습니다. 그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시고 죄악된 내면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높은 곳에 앉아 손가락이나 까딱하고 방향주고 지시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낮아지고 함께 하는 희생과 사랑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구원역사의 원칙이요 진리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 낮아지시고 자기를 비우신 모습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보통 영광은 손흥민 선수처럼 축구를 잘하거나 봉준호 감독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오히려 성육신하신 모습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영광의 실체는 바로 예수님 안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습니다. 은혜는 구약에서 ‘헤세드’로서 ‘자비로운 사랑’, ‘인생들을 향한 한량없으신 긍휼’을 가리킵니다. 진리는 언약적 신실함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죄에서 돌이켜 온전케 하는 말씀의 힘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는 구원역사의 축으로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은혜가 충만하면 진리가 부족하고 진리가 충만하면 은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은혜만 많으면 좋은게 좋은 거라며 무조건 봐주다가 사람을 망칩니다. 또 은혜는 메마르고 진리만 충만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끊임없이 지적하게 됩니다. 자꾸 죄를 지적하면 주눅 들고 죄의식에 빠져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감당해주는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 사람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사마리아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물 좀 주시겠습니까?’ 낮아져 대화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내가 그로라’ 하시므로 죄에서 돌이킨 삶,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또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바로 어떤 죄인도 감당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정죄받아 마땅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받아 마땅하심에도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한량없는 은혜와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자녀되게 하시는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죄인을 어두움에서 건지시고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학창시절 빛 가운데 초청하시는 목자님들을 피해 담을 뛰어넘거나 화장실에 자주 숨었습니다. 교만과 반발심으로 눈을 부라리고 주의 종들을 대적하곤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은혜 받을 꼬투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사랑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저의 딱딱한 마음을 녹이고 어둡던 내면에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 하여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 자기 하나 감당하지 못하던 자가 가정을 이루고 직장 일을 감당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이 무척 강하였지만 성육신하신 주님을 따라 낮아져 아쉬운 소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들을 싫어하던 터라 은혜라도 충만한 사람이 되고자 연약한 사람,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봐주고 감당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봐주다 보니 부담 없는 사람은 되었지만 진리가 그 안에 심겨지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리가 심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수준이 안 맞아서 함께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형식적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사모님을 통해 책망을 받고 그 동안 소감을 안 쓰던 이마태오 형제에게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경희 사모님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하였습니다. 이 분은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며 목자님이 좋으니 저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며 소감을 절대적으로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은혜도 충만해야 하지만 진리도 충만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은혜란 그냥 봐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함께 하고 연약함을 감당하는 영적씨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은혜가 충만하다는 헛된 자부심을 회개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배워 진정으로 낮아져 함께 하며 섬기며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므로 생명의 빛을 비추는 종으로 봄학기 쓰임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이 자기보다 좀 늦게 태어나셨지만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임을 알고 증거하였습니다.(15)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는 성육신의 은혜가 충만하여 차고 넘쳐서 한번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것 위에 또 은혜 받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학교 다닐 때 장학금 받고 다녔는데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고 또 결혼하여 바로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집을 장만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말만 들어도 은혜가 넘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은혜 위에 더하여 내려주십니다. 죄사함의 은혜, 부르심의 은혜, 사명을 감당할 은혜, 사람은 낳고 키우는 은혜를 끊임없이 내려주십니다. 17절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잘 드러나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은혜와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시므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게 된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사귀고 경배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알고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빛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낮아지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잘 배우고 인격적으로 만나므로 우리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봄 학기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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