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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4-24 (토) 19:06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21년_요한복음_제7강-1.hwp (32KB) (Down: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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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7강]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021년 요한복음 제7강                                                                                                   최동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 / 요한복음 5:1-47
요절 /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으로서 진정한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예수님의 온전하신 자비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소망이 없는 시대 가운데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양들을 일으켜 세우고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I.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1-18)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 유대 3대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는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축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The Sheep Gate)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각종 불치의 병에 결린 환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오랜 고질병으로 인해 삶의 의욕도 사라지고 꿈도 잃어버린 채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서 무기력과 고독과 운명주의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4) 그런데 문제는 천사가 언제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물의 움직임을 포착해도 이들 가운데 오직 1등만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임하는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고 밤에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병자들은 이런 스트레스로 인해 불안, 초조, 불면증, 소화불량, 속쓰림 등 온갖 육신적, 정신적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커피도 함께 마시고 서로 위로도 해주면서 다정하게 지내다가도 물이 움직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치고 다투면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짓밟고 경쟁해야 하는 무자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을 떠나면 그나마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로 이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기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경쟁의 대열에 내몰리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아빠 찬스, 엄마 찬스, 할아버지 찬스까지 총동원합니다. 반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도덕관과 윤리관이 파괴되어 청소년들의 범죄는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가 점점 심해져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의술로도 정복할 수 없는 새로운 질병들이 계속 나타나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갈수록 더 심한 육신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으로 인해 절망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병자들을 대표하는 최고참 병자였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서 지내다 보니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하였습니다. 그를 도와주던 사람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모두가 그를 부담스러워하였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자신을 이런 처지에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슬픔과 고독 속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늘도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세상에 낫고 싶지 않은 병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뻔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첫째로, 그가 나음 받아야 할 병자임을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병자임을 인식하고 나음 받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베데스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소원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누워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나음 받아야 할 병자란 사실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음 받아야 할 병자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로, 그에게 나음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함입니다. 그도 오랜 기간 누워 지내면서 못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그때마다 경쟁에서 밀려 실패하였습니다. 못에 들어갔다가 옷만 적시고 나올 때면 비참한 심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해도 안된다는 패배주의가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나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에게 희망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에 대해 소망을 끊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 속에는 그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낫게 해주실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어떤 고질병도 능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네, 낫기를 원하옵나이다, 제발 고쳐 주소서.”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낫고 싶지만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는 어떤 병도 능히 고쳐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면 그의 병도 단번에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해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자비에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자비는 조건 개선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연못 가까운 곳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 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낫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불평과 원망과 의존심과 무기력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자립적으로 걸어가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 지내던 사람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내면에 강력하게 역사했을 때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다리에 힘이 생겨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죽어가던 한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많은 병자들 중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요, 낫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서 인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21). 예수님은 문제 많은 인생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고질병 환자도 낫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자비를 덧입기 위해서는 믿음과 순종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순종했을 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TV 아나운서가 목사님께 믿음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도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아나운서는 허허허 웃으면서 “그야 계란이 박살이 나겠지요.” 정답을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니요, 계란을 가지고 바위가 깨질 것을 믿고 치면 바위가 박살이 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그가 자리를 들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순종할 때 말씀의 권세가 나를 무기력의 자리에서, 패배와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성경에는 이런 기적의 역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성경에서 기적을 제외하면 껍데기 2장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경쟁에서 이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38년된 병자가 일어나 걷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축하할 일입니까? 그런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병자의 모습이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가 아닌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하 파티를 열어주지는 못할망정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은 옳지 않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기 때문에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며 모든 책임을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이 말씀은 구원의 은혜를 받고 새 인생을 출발한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이 말씀은 그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은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영적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앓았던 육신의 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혀지지 않으면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적극적으로 은혜를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은 후에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님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안식일은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쉬는 날이 아닙니다. 세상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하고 이웃에게 봉사함으로 영혼에 참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죄로 병든 인간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하는 데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의 철학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되이 하심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더욱 박해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자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II.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19-47)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큰 일도 보여주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는 것은 현재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과 동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죽이는 일입니다. 죽이는 일은 사탄과 그에 속한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죽이는 일을 하듯이 하나님은 이런 사탄의 시험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 일에 동참하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바로 이 순간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들’이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믿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육신의 일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내게는 소망이 없어”,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와 죽음의 세력에 갇혀서 죽어가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살려주십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고 영생을 얻음으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장소의 변화가 아니고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듣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38년된 병자도 일으켜 세우시고 죽은 청년도 살아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생명을 얻는 비결입니다.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던 아브라함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몰라 방황하던 사람이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을 들을 때 방황을 마치고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아담 안에서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내면의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죄로 얼룩진 삶을 살던 사람이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두려움 많던 사람이 담대하고 용맹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망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가대 이동원 목자님은 과거 이기심과 교만, 비교의식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을 덧입었을 때 일어나 걷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대학원공부와 바쁜 연구원 생활 중에서도 새벽기도 메신저와 EBF 메신저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방송실 일과 피아노 반주자로도 쓰임 받으며 능력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 말씀의 능력을 덧입고, 죄와 죽음의 요소를 물리치고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수 있습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예수님에게도 주심으로 예수님 안에도 생명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지막 날에는 선을 행한 자나 악을 행한 자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게 됩니다.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고 악행은 불신의 열매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각각 그 행한 대로 상급을 받거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심판도 예수님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의의 기준이 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31절-39절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네 증인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의 증언입니다(33-35). 3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당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증거에 관해 말씀하시는 목적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합니다(36).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는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38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고 마지막에는 죽음 권세를 파하고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친히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십니다(37). 37a절을 보십시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심으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마3:17) 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셨습니다.(마17:5) 이 증언은 다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증언만큼은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넷째는 성경 말씀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오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선을 행할 때에도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과 존경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의 핵심도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미 모세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베데스다와 같은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던 저를 학창시절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말씀 공부를 통해 영적인 세계를 알게 하시고 거듭난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학창시절 바쁜 학과 공부 가운데에서도 마태복음 6장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을 붙들고 먼저 하나님의 역사에 시간과 진심을 드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말씀을 인생 요절로 허락하시고 때마다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캠퍼스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순간 끊임없이 말씀을 공급해 주심으로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고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안일과 싸우며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한 반면 세상의 소리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쉽게 노출이 됩니다. 요즈음에는 모든 작업이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다보니 조금만 영적인 긴장을 늦추면 자연스럽게 인터넷에 관심을 빼앗기게 되고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세상으로 소리보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38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은 진정한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죄로 병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어떤 몹쓸 병에 걸린 사람도 능히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덧입고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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