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휴화산
작성일 2021-06-19 (토) 17:23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21년_요한복음_제14강-1.hwp (32KB) (Down:24)
ㆍ추천: 0  ㆍ조회: 227      
IP: 211.xxx.102
[2021년 요한복음 제14강]나는 선한 목자라
2021년 요한복음 제14강                                                                                                이 종 하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은 유명한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입니다. 저는 몇 주 전 양을 연구하기 위해 강원도의 한 목장을 방문하였습니다. 푸른 목장에서 드문드문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은 매우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양몰이 쇼를 보고 난 뒤 실제로 먹이를 주면서 양을 경험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양들은 유순해 보였으며 맛있는 먹이 앞에서는 서로 밀치고 양보가 없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고, 무리로 열을 지어 움직이고 달렸습니다. ‘양과 목자’의 저자 필립 켈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배우기 위해 실제로 목장과 양 30마리를 사서 8년간 목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양의 만족과 행복은 전적으로 주인이 제공하는 돌봄에 달려있음을 알았습니다. 즉 선한 목자를 만날 때 양은 기름지게 살찌며 평안하게 쉼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치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잘 따르므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초장에서 맛있는 말씀의 꼴을 먹고 참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초장에 들지 못한 양들을 초청하여 그들도 같이 풀을 뜯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Part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스라엘 유대 산지는 땅이 험하고 거의 돌밭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지형 조건 때문에 유대 땅은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유목을 하기 좋았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매우 친숙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생활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좋은 풀을 찾아 양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사나운 들짐승들과 싸워야 했고 양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들을 밤낮으로 경계해야 했습니다. 이런 동안 목자는 양들을 끊임없이 보살피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1,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예수님 당시에는 돌담으로 만든 공동우리가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낮에는 양들을 밖의 초장에서 풀을 먹이고 밤이 되면 이 우리에 양들을 두고 문지기가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지기 몰래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절도나 강도였습니다. 그들은 양을 해치기 위해 들어가기 때문에 떳떳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밤에 혹시 자신의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하면 언제든지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증언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출교시켰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출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그 우리에서 훔쳐가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바리새인들은 양들의 생명을 해치는 절도와 강도들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밤새 양떼를 맡겨놓고 간 목자는 동이 트면 양을 찾으러 우리에 갑니다. 이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면 문을 통과한 목자는 여러 집의 양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서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그 특성에 따라 부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인격적으로 잘 알고 사랑하므로 각자에게 맞는 이름을 지어놓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순종이, 사랑이, 막둥이, 온유... 그러면 양들은 자기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곧장 목자에게로 달려왔습니다. 목자의 부르는 소리에 양들이 바로 반응하는 것은 자기들을 돌보아 주던 목자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목자는 양들을 먹이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비바람을 막아줄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고, 무자비한 야생동물과 기생충으로부터 보호해주었습니다. 그 목자의 사랑을 알기에 양들은 목자의 부르는 소리에 밤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고 목자에게로 달려 나온 것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몰이꾼이 아니라 인도자였습니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목자를 무한히 신뢰하기에 따라갑니다. 목자는 좋은 풀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지런한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좋은 초장을 찾아 이동하며 방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동은 때로 힘들고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헌신적인 목자가 있기에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목자는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앞서 나가며 길을 열었습니다. 고즈넉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목자의 흥얼거림을 따라 양들은 안심하며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앞서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섬김 받지 않으시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다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심하게 반발하고 계속 죽이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은 병자들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먹어 비난받을 때도 그들 편에서 변호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말씀하십니다(요13:14,15).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모든 면에서 앞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양으로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가신 길을 따라갈 때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삶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야생에서 사자는 무서운 힘과 발톱 그리고 어떤 동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치타는 가장 빨리 달리는 발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동물은 보호색으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자기를 보호할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힘도 없고 겁이 많은 동물로 산토끼 한 마리만 덤불속에서 갑자기 뛰어 나와도 온 무리가 도망을 칩니다. 들개 두 마리가 하룻밤 사이에 292마리나 되는 양을 물어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은 어떻게 해야 이 야생에서 생존할 수 있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양에게 발달한 청각으로 목자의 음성을 구분하여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그를 따르는 양떼와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목자의 손에는 막대기가 있어 들짐승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던집니다. 그러면 목자의 노련한 솜씨에 막대기는 들짐승의 머리를 때리고 들짐승은 “캥”하는 비명을 지르며 멀리 도망을 갑니다. 그러므로 양은 비록 약한 동물이지만 목자만 있으면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주 말씀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눈을 뜬 후에 바리새인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가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 것은 예수님이 그의 목자이심을 알고 예수님의 양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목자와 양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양의 문’이란 산지에 있는 간이 우리의 문을 배경으로 합니다. 목자는 여름이 되면 더운 날씨를 피해 양들을 데리고 높은 산지로 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팔레스타인 노정에 목자와 양들이 밤을 지낼 수 있도록 간이 우리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는 문이 없으므로 목자는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이 우리의 입구에 가로누워 문 역할을 하며 잠을 잤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으로 들어간 양들은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목자의 속을 썩이며 무리를 이탈하는 양이 있는데, 혹시 길을 잃어 우리에 들지 못하는 날이면 필경 그날은 주위 들개나 늑대의 식사거리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반드시 양의 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8, 10절을 보십시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거짓 메시야들을 가리킵니다. 도둑은 양떼들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그들은 양을 훔쳐서 잡아먹거나 팔아 돈을 벌고자 합니다. 양이 절도나 강도를 만나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의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절도나 강도를 만나면 빼앗기고 멸망당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됩니다.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 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문이 되십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로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유로움과 평안과 풍족한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마련해준 맛있는 풀과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시원한 그늘에서 편한 자세로 누워 안식을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써 생명을 얻고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그들의 내면에 계시므로 삶이 변화되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풍성하게 되었습니까?

1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완전하고 이상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목자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가 되십니까?

첫째로,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자신의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양에게 가장 좋은 풀과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사나운 들짐승이 나타나면 자신의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싸웁니다. 다윗은 그 시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 35절에서 다윗은 사울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이런 다윗은 선한 목자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셨고, 일생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시고 양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에는 양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의 양으로 삼으시기 위해 자신의 피로 그 값은 치루신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양들을 잘 아십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이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양을 위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두 귀와 두 눈으로 항상 살피면서 양들에게 작은 문제만 있어도 즉시 일어나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북미의 체로키 인디언은 남자아이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성인식이 있는 날 저녁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가리고 먼 길을 떠납니다. 강을 건너 골짜기를 지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이르면 아버지는 모닥불과 아들만 남겨두고 사라집니다. 이제 아들은 밤을 새우고 이 숲속에서 살아남아야 진정 성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렇게 멀리 집을 떠나 본적이 없는 소년은 곧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숲속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심한 전율을 느껴야 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게 어느 듯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소년은 이제 살았다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위에 한 남자가 활에 화살을 장착한 채로 소년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소년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아들을 지켜보며 온 밤을 함께 지샌 것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완벽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늘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의 양 된 우리가 기뻐할 때 기뻐하시고 우리가 힘들어할 때 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항상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세상에는 선한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삯군도 있습니다. 삯군은 삯을 위해서 양을 돌봅니다. 평소에는 선한 목자와 삯군을 잘 구분할 수 없지만 위험이 닥치면 알 수 있습니다. 삯군은 양을 자신의 일부라 생각지 않고 재산으로 보기에 양들을 먹이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을 하지만, 정말 자신이 위험할 것 같으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위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삯꾼이었습니다.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은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양이요, 길 잃은 양입니다.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양은 세상에서 사단의 지배아래 죄로 인해 갈등하고 방황하며 피폐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길 잃은 양은 아무리 보살펴 주어도 다른 초장의 풀이 좀 더 기름지고 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양은 이 초장, 저 초장을 서성거립니다. 이런 양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반적인 목자는 멱따는 칼로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목장으로 들어와 한 무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찾으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열었습니다(눅 15:4-6). 예수님은 위험에 처해 있는 양을 찾을 때까지 어디까지든지 찾으러 다니시며 굶주려 바싹 마른 양을 만나면 기뻐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먹이고 기름을 발라 주시며 안식을 누리도록 쉼터를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을 죄와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귀신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19-21).


Part 2. 누가 예수님의 양인가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님은 초막절에 양과 목자 말씀을 하시고, 약 2달 뒤 수전절에 성전에 계셨습니다. 수전절은 성전 회복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기념하는 명절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매월 25일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의 이런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을 결정적으로 자극했고, 주전 167년, 제사장 맛다디아는 이방 제단을 부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마카비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끝에 마침내 성전을 탈환하고, 신실한 제사장들을 세워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이날은 주전 164년 기슬르월 25일(태양력 12월 25일)로, 8일간 봉헌 축제가 열렸고 이후 그 날을 기념하여 하누카라고도 불리는 수전절 절기가 되었습니다.

23, 24절을 보십시오. 이 수전절에 예수님은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고 계셨는데,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언제까지 자신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라면 분명하게 말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만일 그리스도라면 마카비와 같은 회복의 역사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행하신 표적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 같기는 하나 자신들이 기대하던 일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는데도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예수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예수님께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어떤 만물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시편 82편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말한다고 어떻게 신성모독이라고 하는지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믿으라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믿지 않는 그들을 떠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상에서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가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에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알고 따라가는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풍성한 평강의 인생을 살게 하시며 영원히 멸망치 않는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대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울하고 참람한 마음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UBF로 인도하시고 주님의 말씀 목장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의 좋은 양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소시민적이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염소 같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저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할 때 실제적인 주님의 양육은 결혼 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광운대 개척을 섬겼는데, 광운대생들의 인생문제를 잘 듣고 그들이 제자로 서는 비전 가운데 가정을 드리며 열심을 다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태릉선수촌에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4번의 올림픽과 4번의 아시안게임 선수단 주치의가 되게 하시므로 지극히 좁은 생각만 하던 제가 이방인을 이해하고 시야가 넓어지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소심하던 제가 큰 행사 때마다 많은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어떤 부담스러운 일도 꿋꿋이 감당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 캠퍼스미션을 위해서는 대학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교 은사 교수님을 통하여 저를 경희대병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실패 끝에 저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주님은 저를 잘 아시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저의 가장 큰 기쁨은 네 자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무어라 할지라도 그들은 주님이 저에게 주신 복이요 소망이라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대학 진학이 지체되자 저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저의 순영 동역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니 조급해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저는 자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자 주님은 네 자녀를 인격적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제임스가, 요즘에는 마태오가 신실한 저의 동역자로 성장해감으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11월 마지막 주 주일 광고에서 서제임스 목자님께서 새벽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저의 새벽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래 저는 늦잠으로 인해 식구들에게 유명하였습니다. 이런 제가 새벽을 깨워 기도를 하게 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오랜 기간 잠을 적게 자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영적으로 깨어있는 주된 힘이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저는 눈앞에 보이는 풀만 뜯는 양이었지만 주님의 목장에서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저를 가장 잘 아시고,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물질이 필요할 때 물질을 주시고, 명예가 필요할 때 명예를 주셨으며,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 대학에 왔을 때 저의 인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60이 된 요즘 감히 내리는 결론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 삶이 가장 성공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계속 주님의 목장에서 말씀의 풀을 먹고 목자 되신 주님을 좇는 생활을 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제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도 예수님을 따라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양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는 목자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아 이 시대 구원역사에 선한 목자로 귀하게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721 빌립보서 [2021년 빌립보서 제3강]그리스도를 알고자 관리자 2021-09-19 63
720 빌립보서 [2021년 빌립보서 제2강]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관리자 2021-09-11 112
719 빌립보서 [2021년 빌립보서 제1강]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관리자 2021-09-05 114
718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26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관리자 2021-08-28 150
717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23강]진리의 왕이신 예수님 관리자 2021-08-22 162
716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22강]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관리자 2021-08-15 163
715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 21강]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관리자 2021-08-07 197
714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20강]내 안에 거하라 관리자 2021-07-31 209
713 요한복음 [2021년 여름수양회 제4강]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관리자 2021-07-25 171
712 요한복음 [2021년 여름수양회 제3강]다 이루었다 관리자 2021-07-24 128
711 창세기 [2021년 여름수양회 제2강]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관리자 2021-07-24 122
710 누가복음 [2021년 여름수양회 제1강]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관리자 2021-07-23 110
709 다니엘 [2021년 여름수양회 특강]다니엘서 특강 관리자 2021-07-22 80
708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9강]내가 곧 길이요 관리자 2021-07-18 271
707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8강]서로 사랑하라 관리자 2021-07-10 177
706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7강]한 알의 밀 관리자 2021-07-03 212
705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6강]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1-06-27 209
704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4강]나는 선한 목자라 휴화산 2021-06-19 227
703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3강]세상의 빛 예수님 관리자 2021-06-13 205
702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12강]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관리자 2021-06-05 305
12345678910,,,37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