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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6-27 (일) 08:33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21년_요한복음_제16강-1.hwp (30KB)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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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16강]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2021년 요한복음 16강 메시지 (최동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2:1-19
요절 / 요한복음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복음 1장부터 11장까지 공부하면서 일곱가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웠습니다.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이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맞이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은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냅니다(1-11). 둘째로, 어린 나귀 타고 입성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12-19).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나에게는 어떤 분이 되시는지 깊이 만나고 예수님께 온전한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I.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1-11)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들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유월절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베다니를 심방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 감람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그곳에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르다, 마리아와 나사로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병들어 죽어 무덤에 묻혔던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들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잔치는 인류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에게도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마리아가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앞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했습니다.(요11:27) 그리고 이제 온 힘과 진심을 다해 기쁨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며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가 마지막 베다니 심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꼭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열심히 듣던 마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마리아는 어디에 간 것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잔치 분위가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향유는 귀한 손님이 오면 환영하는 의미로 머리에 한 두 방울 떨어뜨려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한꺼번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가장 더러운 곳입니다. 반면에 머리털은 여인에게 있어서 영광의 상징입니다. 여인들은 머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머리를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마리아는 그런 영광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였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향유는 결혼지참금으로서 미래의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한 방울, 한 방울씩 정성 들여 모았습니다. 향유옥합에는 결혼에 대한 꿈과 소망이 담겨있었습니다. 향유가 모일수록 꿈과 소망도 구체화되어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소중한 향유를 한 번에 예수님께 다 부어드렸습니다.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마리아는 한 번의 잔치만으로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참 남편이요 진정한 경배의 대상으로 영접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부어드렸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는 예수님은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요, 생명의 주관자로서 인생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집은 순식간에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진심을 쏟아 붓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곳에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피어나 널리 퍼져 나갑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향기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본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고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사라 베리 선교사님은 미시시피의 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많은 남성들로부터 청혼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후 결혼의 꿈도 깨뜨려 주님께 드림으로 전 생애를 세계선교 역사에 바치셨습니다. 사라 베리 선교사님의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지난 60년간 UBF 가운데 큰 영향을 끼쳐 많은 분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드려 헌신하는 역사가 이어졌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나의 생명의 구주요,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부어드리는 믿음의 헌신이 계속 이어지게 하시고 우리 모임을 통해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계속해서 퍼져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발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향유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화를 내면서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책망하고 있습니다.(막14:4)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 값을 계산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노동자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가룟 유다의 눈으로 볼 때 마리아의 행동은 비싼 돈만 괜히 허비하는 무모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가룟유다의 말 자체는 명분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코로나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구제헌금으로 드린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기부한다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홍보도 되고 기독교의 이미지도 좋아져서 복음사역을 섬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룟유다는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의 가치를 산술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의 계산에는 예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을 만큼 예수님의 신임을 받는 제자였지만 실상은 돈궤에 넣은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예수님께 쏟아 부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돈의 가치로 헤아릴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예수님보다 돈과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노예 몸값에 해당하는 은 삼십에 팔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를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향유를 부어드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향유는 장례식에서 무덤에 묻히기 전에 시신에 발라 부패와 악취를 방지하는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치기 재판을 받으시고 안식일 바로 전에 돌아가심으로 향유를 발라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장례를 위한 절차의 일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꼭 필요한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 하심으로 마리아의 행동을 복음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진심이 담긴 향유 한 방울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다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은 절대로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가난한 자들,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시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습니다. 구제 사역도 복음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교회의 사명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향유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을 위해 드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생들의 죄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생들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주님께 드려 경배하는 일은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임을 알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은혜 안에 살고 있음을 알 때 내가 드리는 어떤 수고와 희생도 결코 아깝다거나 허비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예수님은 나의 소중한 생명을 바쳐 경배할 유일하신 왕이 되십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와 복음 역사에 아낌없이 부어드림으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님만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부활의 산증인이 되었습니다. 나사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이제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파 출신들로서 나사로가 부활의 증거로 살아있는 한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가르침의 권위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나사로를 죽임으로 부활의 증거를 인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II.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12-19)
12,13절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열렬히 환영하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번영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개선장군이나 왕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괴롭히는 모든 질병과 고통, 죄와 죽음을 파하시고 승리하신 개선장군과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지으시고 만물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이런 환영을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호산나!’ 이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시편118:26절에서 인용한 구절로서 약속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다윗과 같은 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압제와 각종 인생 문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능력 있는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 분이야 말로 자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큰 승리를 이루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우리를 구원 하소서!” 예수님은 무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성하시는 모습은 무리들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보통 왕이라면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위엄과 권위를 갖추고 입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발은 땅에 닿아서 뒤뚱거렸을 것입니다. 어린 나귀가 힘들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엉거주춤 앉아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왕의 위엄이나 체통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입니까?

첫째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가랴서 9장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무리들의 기대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낮아져 섬기는 겸손의 왕이 되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린 나귀는 예수님의 통치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말을 타고 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권력으로 통치합니다. 이런 세상 왕들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노역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탔다고 하였습니다. 나귀는 평화 시에 짐을 운반하는 데에 주로 사용됩니다. 어린 나귀는 연약합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군림하시기보다 어린 나귀를 타신 모습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힘이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15절에서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세상의 악한 자들과 대적자들에게는 여전히 엄하고 두려운 심판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인생들의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백성들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신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그들은 무리들에게 환영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별의 순간이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로마를 몰아내고 강력한 이스라엘을 건설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욕심에 누가 크냐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이 예언된 메시야시오, 겸손의 왕이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이 말씀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왜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현재 살아있는 모습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생하게 증거합니다. 무리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야 말로 로마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과 나사로까지 죽이려 계획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것을 보고는 그들이 어떤 조치를 해도 다 쓸데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이는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겸손하게 낮아져 섬기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지도자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안고 방황하다가 죄로 병들고 동족들에게조차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까지 낮아져 겸손하게 섬겨주셨습니다. 여인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동네로 달려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외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던 도마도 끝까지 감당해주시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갖기까지 섬겨주셨습니다. 마침내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며 감격적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겸손의 왕으로 이 땅까지 낮아져 오셔서 허물 많은 죄인들을 섬겨주시고 평화의 왕으로 다스려 주시고 주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생명의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날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가운데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일생 세상의 유익을 좇아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죽어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던 저를 구원하여 주시고,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을 가정 요절로 허락하시고 저희 가정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 양들을 섬기고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낮아져 섬기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전에 당연하게 드리던 것에 대해서도 계산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섬겼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쉬엄쉬엄 적당히 섬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을 이전하여 새롭게 개업을 한 후 저의 마음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병원 일에 빼앗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마음에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식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으며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낮아져서 섬김으로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짐을 지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캠퍼스 영혼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짐을 벗고 구원의 기쁨과 생명력을 덧입기까지 낮아져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데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낮아져 오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저희의 심령에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부어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뜨겁게 영접하고 실제 삶에서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우고 죄로 병든 양들을 낮아져 섬기는 가운데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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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9강]생명의 떡 예수님 휴화산 2021-05-09 171
697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8강]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관리자 2021-05-01 201
696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7강]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관리자 2021-04-24 183
695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6강]말씀을 믿고 가더니 관리자 2021-04-17 194
694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제5강]참된 예배 관리자 2021-04-11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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