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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15 (일) 10:24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10강-1.hwp (108KB) (Down: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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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0강]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2022년 누가복음 제10강                                                       오정훈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말씀 / 누가복음 7:18-50
요절 /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흔히들 말하기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많은 죄를 사함 받아 넘치는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통해 죄 사함과 사랑의 관계가 어떠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인가 깨닫고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18-35)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세례요한에게 알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란 앞에 있었던 문둥병자, 중풍병자,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특히 나인성 죽은 청년을 살린 사건을 가리킵니다. 아마 요한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아 예수님이 바로 오실 메시야가 분명하시구나’ 확신을 덧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물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확신있게 증거하였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감옥에 있다 보니까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종말론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음란하고 불의한 헤롯을 심판하시므로 세상에 공의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이런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로 인해 답답하고 회의가 생겨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제자들을 보냈을 때 예수님은 마침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들을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초로 메시야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2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는 모두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들에 관해 예언한 것들입니다. 맹인, 앉은뱅이, 소경, 나병 이는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들로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낫게 할 수 있는 병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육신의 질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므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또 문둥병처럼 죄로 추하고 병든을 치유하사 깨끗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이 일을 하고 계신 오실 그이, 메시야가 되십니다.
23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실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예수님을 믿다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과 불신에 빠집니다. 내 인생문제 결혼문제 건강문제 자녀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무슨 메시아야? 원망합니다. 그러나 어둡던 내 인생 가운데 생명의 빛을 비추시고 운명적이던 내 인생을 섭리의 인생으로 바꾸신 예수님은 유일한 나의 구주요 메시야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오실 그이 메시야오 굳게 믿음으로 어떤 문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요한이 회의에 빠져 실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정말 실족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3가지 질문을 하시므로 그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24b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갈대는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래서 줏대 없이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을 갈대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불같은 사람으로 백성들의 죄를 거침없이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았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그 시대 깨어 있는 의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확고한 믿음과 용기에 이끌려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25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당시 부드러운 옷, 비단 옷은 상위 1%만이 입을 수 있는 매우 값비싼 옷으로 주로 왕궁에 있는 사람들이 입었습니다. 반면 요한은 약대 털로 만든 거친 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의 청빈한 삶, 경건한 생활에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씀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26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사람들이 광야에 나간 이유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려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선지자가 아니라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자라고 하십니다. 27절입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이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요한은 예수님 바로 앞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은 패이고 구부러지고 높아진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하고 곧게 펴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땅을 파고 바닥을 평평하게 다져서 집을 세우기 위한 기초공사와 같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패역한 시대에 요한은 목숨 걸고 이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 하십니다. 28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의 사명과 삶이 그를 가장 위대한 자가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을 배척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자의 신분이 완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인간 세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그의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살아왔기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므로 전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10-12절은 그들이 얼마나 자기의로 충만한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필요치 않았기에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이 세대’는 뉘앙스상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시대 전반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2절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을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들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 모여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했는데 ‘결혼식 놀이’를 할 때는 한쪽이 피리를 불면 한쪽이 춤을 추었고 ‘장례식 놀이’를 할 때는 한쪽이 곡을 하면 한쪽이 우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리액션이 중요한데 리액션을 전혀 하지 않으므로 흥이 깨져서 서로 불평하고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절제된 삶을 살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 울면서 회개하는 게 마땅한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춤을 추고 천국잔치에 참여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금식하면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지와 헛된 확신으로 세례요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35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 곧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지혜의 가르침을 듣고 거기에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복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혜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옳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배척하는 자들로 인해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확신하고 천국복음을 힘써 전파하셨습니다. 우리도 배척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죽지 말고 결국 지혜가 옳다함을 얻을 것을 믿고 확신 가운데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36-50)
36절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문둥이 시몬으로 알려진 바리새인으로 아마 예수님을 권위 있는 랍비로 생각하고 식사에 초대해서 이것저것 묻고자 한 것 같습니다. 보통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반면 시몬이 열린 마음으로 초대하자 예수님도 그의 초대에 응해 그 집에 앉으셨습니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여인으로 유대인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공개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것을 보면 그는 당시 공인된 죄인 중 한 부류였던 창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이 여인은 죄로 더러워진 여인이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 내어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런 여인의 행동을 38절에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8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향유 옥합을 들고 온 여인은 예수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감정이 복받쳐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밥 먹는데 왜 다짜고짜 와 가지고 청승맞게 우는 것일까요? 얼마나 울었는지 여인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형제들은 주로 군대에서 강한 훈련을 받고 난 다음 첫 예배드릴 때 그렇게 운다고 합니다.> 아마 여인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많은 눈물을 흘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정성스럽게 닦아 드렸습니다. 당시 여인들의 머릿결은 여인의 영광으로 여겼기에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을 굉장한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그런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머리 결로 예수님의 먼지 묻은 발을 닦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지극한 감사와 경의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너무나 대조됩니다. 또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발에 입 맞추었다는 것은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나타냅니다. 또 대체로 머리에 향유를 부음으로 존경을 표시한 것에 반해 여인은 발에 향유를 부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 행동임을 나타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주님께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와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것으로 예수님에게 보여야 할 가장 합당한 반응, 리액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바리새인 시몬은 몹시 당혹스러웠으며 화가 났습니다. 아마 죄인이 경건한 자신의 집에 들어온 것부터 기분 나빴으며 이런 여인의 돌발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는 예수님으로 인해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선지자라면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곧바로 알아차리고 몸에 접촉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시몬은 여인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동네에서 죄 많은 여인이라고 소문난 여인이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쾌했고 그런 여인을 받아주시는 예수님이 더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41,4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오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5천만원이고 오십 데나리온이면 5백만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백만원도 적은 돈이 아닌데 오천만원이면 정말 큰 금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많은 빚을 탕감받으면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정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시몬도 그것을 알고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시몬과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말씀하여 주십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귀한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거나 종들을 시켜서 발을 씻겨주었는데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환영의 입맞춤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환영의 의미로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데 그는 향유는 고사하고 값싼 감람유조차도 붓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그냥 냉랭하고 형식적으로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맞이하는 그런 집에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게 됩니다. 좀 과장되더라도 열렬히 환영하고 맞이해 줄 때 기분이 좋고 제대로 초대받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그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여인은 형식적으로 적당히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였을까요? 4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이 이렇게 한 것은 죄 사함의 은혜가 많기 때문이요 시몬이 마지못해 예수님을 대한 것은 죄 사함의 은혜가 적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시몬은 여인보다 죄를 더 적게 지었기 때문에 죄 사함의 은혜가 적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인이나 시몬이나 둘 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많은 빚을 진 동일한 죄인입니다. 다만 여인은 시몬보다 자신의 죄를 더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죄 사함의 은혜가 절절하여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의 빚의 차이는 죄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받은 죄 사함의 은혜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 적게 가지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깊이 자기 발견할수록 죄 사함의 은혜가 커서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고 감사와 기쁨으로 더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일만 달란트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마18:24) 금 한 달란트는 34kg인데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억 원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25조원으로 자손 대대로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이 빚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고 그 후에는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의 빚을 예수님이 대신 지게하심으로 단번에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 사함의 은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근거요 힘이 됨을 배우게 됩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많을수록 예수님께 대한 사랑도 많을 것이요 죄 사함의 은혜가 생생할수록 예수님께 대한 사랑도 더 뜨겁게 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감격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처음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얼마나 감격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까? 그런데 바쁜 현실로 인해 죄 사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지금은 냉냉하기 그지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그동안 열심히 섬긴 것을 통해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보상심리로 가득 차 예수님께 반발하고 쓴 뿌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죄만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현재도 무수한 죄를 짓고 있는데 때마다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로 이제도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 것이 나의 의 때문이 아니라 비참한 인생을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기억하고 본문의 여인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섬기는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사함의 은혜가 ‘나도 한때는 그런 때가 있었지’ 하는 과거형이 되어서 안되겠습니다. 항상 그 은혜가 살아 있어 본문의 여인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힘써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늘 죄사함의 은혜가 살아있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유명한 순회 전도 목사인 존슨 오트만은(1856-1922) 찬송가 429장에서 다음과 같은 해답을 주었습니다. 찬송가429장을 다 같이 불러보시겠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주님의 은혜가 흐려졌을 때 주님이 주신 복을 세어보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세어보고 기억하므로 여인과 같은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48절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부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인의 사랑의 행동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심으로서 여인이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선포하여 주십니다. 여인에게 일어난 역사는 근본 믿음의 역사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역사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고 믿음으로 나올 때 어떤 죄인도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보며 1995년 3사관학교 충성당 예배당에서 첫 예배드릴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입소하고 몇 주 지나 첫 예배를 드렸는데 준비찬송가가 ‘주 없이 살 수 없네’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볼까 부끄러울 정도로 눈물이 났는데 이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감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코로나를 빌미로 비대면 속에 숨게 되며 주님을 향한 마음이 점점 식어갔습니다. 여인이 보여준 감사와 감격은 사라지고 바리새인 시몬처럼 형식과 예의만 남게 되었습니다. 또 제가 빚을 좀 지기는 했지만 이만큼 수고하고 헌신했으면 어느 정도 빚을 갚은 것이 아닌가 주제넘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또 이제까지 수고하고 헌신한 것에 비하면 받은 것이 별로 없다는 손해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와 손해의식으로 가득 찰 때 더이상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저에게 냉랭해진 마음 형식적인 마음을 책망하시고 제가 갚을 수 없는 많은 죄의 빚을 탕감받은 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죄인입니다. 제가 오늘 사는 것은 죄인을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과거형의 죄 사함의 은혜만으로 형식적으로 살던 것을 깊이 회개합니다. 찬송가처럼 제가 받은 죄 사함의 은혜를 세어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오는데 제가 이를 새롭게 기억하고 이 은혜에 힘입어서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 되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면 우리에게 임한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냉랭하고 형식적으로 지내던 것을 회개하고 여인처럼 많은 죄 사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힘을 다해 섬기는 종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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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 시편 [2022년 추수감사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관리자 2022-11-20 102
784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4강]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2-11-13 114
783 이사야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2강]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관리자 2022-11-06 85
782 이사야 [2022년 가을 제자수양회 제2강]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관리자 2022-11-06 75
781 로마서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1강]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관리자 2022-11-05 61
780 로마서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1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관리자 2022-11-05 67
779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3강]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관리자 2022-10-30 106
778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2강]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관리자 2022-10-23 136
777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1강]영생을 얻는 길 관리자 2022-10-16 144
776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0강]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관리자 2022-10-09 172
775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9강]엎드리어 감사하니 관리자 2022-10-02 182
774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8강]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관리자 2022-09-25 196
773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7강]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관리자 2022-09-18 184
772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6강]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관리자 2022-09-11 219
771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5강]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관리자 2022-09-04 169
770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4강]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관리자 2022-08-28 220
769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3강]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관리자 2022-08-22 213
768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2강]염려하지 말라 관리자 2022-08-14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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