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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6-02 (일) 12:33
분 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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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12강]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2019년 창세기 제12강                                                              이인구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말씀/ 창세기 17:1-27
요절/ 창세기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언약의 말씀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배우고, 하나님의 언약을 영접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는 13년의 시간간격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3년 동안의 아브람의 삶의 기록이 없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나이가 99세요 이스마엘의 나이 13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3년 동안 도대체 아브람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얻은 후에도 처음에는 사래를 통해 자녀를 얻고자 간절한 바램가운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길어질수록 지쳐갔고 그중에서도 이스마엘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습니다. 이스마엘의 작고 가는 손가락을 보며 고사리 같다는 표현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잠자는 얼굴에서 사랑과 평화를 느꼈고 자신을 향해 웃는 미소를 보면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왔습니다. 잠만 자던 아이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아빠, 아빠!” 아브람을 따라 다니며 똑같이 흉내를 내는데 붕어빵처럼 자신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새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로 믿고 싶어졌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쫓아낸 후에도 하나님이 하갈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며 많은 후손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이제 사래는 폐경기가 되어 인간적으로도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사래가 아닌 하갈을 통해 자식을 주실 계획이라면 힘들게 고향을 떠나 무식하고 강포한 가나안 땅까지 와서 아내까지 뺏기며 전쟁의 위험에 빠지며 이렇게 생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그냥 아버지 집에서 똑똑하고 튼튼한 여종 중 한 명을 택해 자식을 가지면 될 것이 아니었나?’ 이스마엘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뒤편에서 사래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릴 때는 아브람은 내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아쉬움과 원망이 솟아났습니다. 점차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이제 형식적인 예배만 드릴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 13세가 되어 스마트폰이나 게임도 없는 곳에서 아직 사춘기도 찾아오지 않은 이스마엘을 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고 소중하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24년 동안을 보이지도 않는 파랑새를 좇아 달려왔지만 이제 작지만 눈에 보이는 확실한 행복, 소확행인 이스마엘을 붙들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자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최근 ‘소확행’이란 말이 많이 쓰여집니다. ‘소확행’이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된 말입니다.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이나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등을 자신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처럼 치열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소확행을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소확행을 통해 쉼과 기쁨을 얻고 내일 힘든 세상에서 또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소확행으로 나태의 죄를 합리화합니다. 열심히 노력 후 얻는 미래의 큰 꿈과 행복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지금 눈에 보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는 높은 곳에 열려있는 포도를 따먹고자 힘을 썼지만 안되자 포기하고 돌아가면서 말했습니다. “분명히 저 포도는 못 먹는 신포도가 틀림없어!” 또 많은 장사꾼들이 소확행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낭비죄(탕진)를 부추깁니다. 최근 삶의 트랜드가 healing(치유)에서 YOLO(you only live once)로 바뀌다가 이제 소확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세 단어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동시에 기업들은 마케팅용으로 이 단어들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healing’을 외치며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행동에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다가, "한번 사는 인생 뭐 있어? 즐기자!" 나를 위해 막 쓰도록 'YOLO'의 의미를 부여하다가 이제 '소확행'을 외치며 미래의 큰 꿈보다 지금 잡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위해 소비하도록 부추깁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지만 결국 덧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쾌락일 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소확행은 치열한 삶속에서 잠깐의 휴식이었습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새벽 4시에 일어나 5-6시간을 글을 쓰고 10km정도를 뛴 후에 영감을 얻기 위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은 후 저녁 9시에 취침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지독할 정도로 몰입하다가 지쳤을 때 얻을 수 있는 작은 쉼이자 선물이 소확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소확행에 집착할 때 더 큰 행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자식이란 소확행만을 구할 때 더 큰 행복, 진정한 행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놓쳤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행복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라캉(프랑스 철학자)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자신만의 소확행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남의 소확행을 모방하면서 행복하다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싶은지 아니면 행복해보이고 싶은지 구분해야 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통해 행복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매일 커피 맛을 깨닫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매일 커피를 마시지만 그것은 원두맛보다 그 속의 설탕과 프림을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때 행복한지 아는 것은 사회적 행복을 아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이라는 잣대로 타인은 잘 평가하면서 정작 자신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서야 나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헛된 행복에 매여 있는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온 후 한 번도 그의 실수와 죄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기근의 때에 두려움으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다 빼앗긴 때에도 책망치 않으시고 그의 죄와 실수를 감당해주셨습니다. 또 그가 약속을 받은 후에도 불신에 빠져 하갈을 통해 아이를 잉태한 후에도 그의 죄를 감당해주셨습니다. 하갈이 잉태된 후 사래의 시기로 집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아쉬울 때 좋아하다 부담되면 버리는) 유기견처럼 취급되는 하갈과 새 생명을 방치할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신 후 태어난 이스마엘도 일생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아브람 밑에서 최소한의 신앙교육을 받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죄로 인해 날 때부터 어긋난 그의 인생도 하나님을 따르며 축복받도록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두신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의 나이 13살이 되어 아브람이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할 때 더 이상 기다리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의 불신을 책망하시며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죽은 생명을 살릴 수 있고 또 불치병에 걸린 생명도 치유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히 늙은 사라에게 새 생명을 잉태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주시는 언약의 축복을 이렇게 오래 지체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람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후 그때 축복(자식)을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 전쟁 후 현실의 손해의식과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아브람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뭇별을 보고 하나님이 방패요 상급되심을 믿었습니다.(창15;6) 하나님은 그 때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는데 왜 그때 축복을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결국 아브람은 기다리다 불신에 빠져 이스마엘을 갖게 되고 이스마엘은 당시뿐 아니라 현재도 많은 분쟁과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축복을 그렇게 오래 지체하시는 것입니까? 많은 신자들이 인생의 문제가운데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많은 축복이 아닌 아브람처럼 그저 자식하나 얻기를 바랄뿐입니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결혼하기를 바라고 남들처럼 안정된 직장에 취직되어 가족들의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강철 같은 건강이나 100세의 장수도 필요 없고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길 바라고 고통스런 병에서 치유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이렇게 오래 지체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람은 단지 아들하나 얻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의 끈을 통해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아브람에게 언약을 성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인간이 바라는 때가 아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때입니다. 완전한 때는 그가 완전히 율법을 잘 지키는 때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그때는 어떤 인생의 실패나 절망이나 한계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가진 때입니다. 그때는 아브람이 인간적 자신감과 승리감이 충만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진정 부족한 자임을 깊이 깨달을 때입니다. 그때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도 바로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노예로 고통 하는 동족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가 출애굽 지도자로 쓰임 받은 때는 40년 광야훈련 후 가장 낮아지고 겸손할 때였습니다. 왜냐면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불신을 책망하신 후 다시 언약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4) 하나님은 첫 부르실 때부터 또 인생의 매 순간마다 언약을 통해 그를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13;16)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아브람은 현실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살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이 믿음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체적으로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5) 하나님은 ‘고상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따랐지만 하나님은 그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람을 부르실 때부터 아브람에게 두신 뜻과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바꿔주심으로 매일 이름을 되새기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 뜻을 영접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는 단지 많은 자손을 거느리는 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조상들은 불신자들 중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많은 자식을 낳는 초식동물이나 곤충이 아니라 자식하나라도 초원을 움직일 수 있는 사자나 독수리로 키우도록 아브람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람 자신이 초원을 움직일 수 있는 사자나 독수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에 맞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지도자(일꾼)로 아브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식하나 없는 늙은 아브람이 어떻게 강한 불신자들과 맞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잡혀먹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할 수 없지만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본이 되는 것처럼, 아브람의 믿음의 삶을 그의 후손들의 본보기(model)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본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언약의 말씀으로 인도하셨고 아브람은 그 언약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절망의 때나 승리의 때나 심지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때에도 하나님의 언약인 말씀을 믿고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인생에서 승리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하셨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맞서도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좇아 살 때 결국 승리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역사의 조상으로 서도록 뜻을 두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한 민족이 서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여러 민족이 서고 번성하는 것은 참으로 긴 시간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 약속의 성취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장래를 바라볼 때 지금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살 수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몇 년 후도 바라보지 못하고 YOLO를 외치며 소확행만을 찾는 이들에게 몇 세기 후 후손의 앞날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는커녕 고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속 썩이는 한 자녀를 인내하지 못해 아버지의 이름을 포기합니다. 아브람도 언약을 받은 지 11년 만에 이스마엘을 갖고 믿음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이 다시 언약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품길 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7)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최종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길 원하십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으로 경배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인도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후 하나님 없이 유리방황하는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할 때 하나님은 홍수심판 후 노아를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자 하셨지만 다시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새로운 구원역사를 시작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셨고(함께 하셨고) 더 나아가 언약의 말씀대로 아브람의 씨를 통해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가 말씀하셨지만 이제 더 명확하게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일생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후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루시지만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해 자신에게 이루실 약속에 동의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영접했다는 증거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아브라함 집에 살며 아브라함에게 속해있는 모든 이들이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할례는 단지 종이계약서 위에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통증을 없애는 마취제가 있고 두려움까지 없애는 수면마취제도 있지만 당시는 마취도 없이 직접 맨살을 잘라내야 하는 큰 고통의 언약식입니다. 지금 신자는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단지 마음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죄악된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큰 결단과 순종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의 할례를 하지 못해 결국 믿음을 잃고 축복을 잃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여행자가 산에 올라갔다가 발이 미끄러져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간절하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날 좀 구해주세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여기있느니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널 구해주려 하는데 넌 나를 믿느냐?” 여행자는 간절히 대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 예배도 드리며 헌금하고 가끔 새벽기도도 나갑니다. 절 구해주시면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할 것입니다.” 다시 위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지켜주겠다. 이제 네가 붙들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그러자 여행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다 다시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사람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에도 머뭇거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사래도 이름을 바꿔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으로 그동안 한 남편의 사랑받는 여인이었지만 이제 ‘여러 민족의 어머니’인 사라로 바꿔주심으로 민족의 여러 왕들을 낳고 키우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고 사라는 구십 세인데 어찌 출산할 수 있습니까.’ 생각하며 하나님께 아뢨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13년 동안 자신의 소확행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스마엘을 놓치 못했습니다.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이스마엘까지 놓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이스마엘의 앞날이 알 수 없는 혼돈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19-21)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언약을 이룰 시기와 또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녀 이름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이스마엘에게 주실 축복까지 약속하시며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고 영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올라가신 후 아브라함은 처음 언약을 붙들고 낯설고 두려운 가나안땅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불신과 두려움으로 아내를 뺏길 때에도, 살벌한 전쟁 속에서도, 전쟁 후 손해의식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불신가운데 이스마엘을 얻고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허무한 행복 속에서 이스마엘을 놓치지 않고자 조급해하고 불안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날 바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본인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이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일생 많은 허물과 죄에 빠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생 외적으로 이룬 것은 약속의 자녀 이삭 한 사람을 낳아 키우고 또 약속의 땅에서 막벨라 굴을 사서 죽어 묻힌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생 중요한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 믿음은 한순간의 마음의 변화 때문에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부름 받은 후 11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며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그 후 13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놓치고 살면서 체험한 헛된 행복이 주는 불안과 공허감 때문입니다. 그는 그 값진 인생의 체험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후대에 믿음의 후손들이 쓴 히브리서는 증거합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2)
하나님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말씀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경말씀 중 어떤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인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자들이 인생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일을 하는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때 그 난관을 온몸으로 부딪쳐 헤쳐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한 발 물러서서 돌아서 갈 것인가 선택상황에서 어떤 말씀을 붙드는 것이 믿음인가 갈등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믿음인가 깨닫기 위해선 평소 꾸준한 기도와 말씀묵상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내 심령에 깊이 다가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만약 그 말씀이 내 인생에 주신 언약의 말씀이라면 아브라함처럼 한번이 아니라 인생가운데 반복해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깨닫고 인도함 받기 위해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주신 언약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주신 언약입니다. 어떤 이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첫 조상으로 그런 약속을 받았지만 지금 수많은 신자들이 다 그런 약속을 받으면 지구상에 민족이 너무 많아지는게 아닌가 걱정합니다. 또 현재 나 한사람은 작고 부족해서 혼자 생존하기도 어려운데 무슨 ‘여러 민족의 아버지’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족하고 작아보여도 아브라함처럼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으로 장차 여러 민족과 많은 후손들의 아버지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살므로 지금 현실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 가운데 한걸음씩 믿음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번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직장에서 많은 피곤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위생사 한 명이 또 실장 위생사와 부딪혀 나가게 됐고 그런 중에 고약한 진상환자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됐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이 움츠러들면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말씀이 심령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열국의 아버지)인 최동진 목자님께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피곤한 중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의 넓고 담대한 내면성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제가 하나님영광을 위해 살려고 할 때 현실 문제를 없애주시기 보다 현실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특히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통해 현실 문제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게 도와주셨습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써 하나님의 긴 안목과 내면성을 덧입고 문제를 통해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문제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 언약의 말씀을 붙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소망가운데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마침내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 현실에 매이지 않고 장래에 대한 소망가운데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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