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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0-20 (일) 12:34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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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4강] 의인은 하나도 없다

2019년 로마서 제 4 강  
말씀 / 로마서 2:17-3:20
요절 / 로마서 3:10

의인은 하나도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입니다. 충격으로 다가오십니까? 이 제목을 누구의 입에서 듣느냐에 따라 어감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범죄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다 죄인이지요, 죄 없는 사람, 하나도 없잖아요!” 자기 죄에 대한 합리화 혹은 물타기 같은 느낌이 납니다. 반면 정말 고상한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면, ‘다 죄인이지요. 죄 없는 사람, 하나도 없지요’, 나의 교만과 천박함을 드러내어 부끄럽게 합니다. 마치 선교현장에서 죽도록 수고하신 선교사가 ‘저는 허물과 실수투성이 뿐이었고,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작은 수고로 우쭐해하는 나의 신앙생활을 부끄럽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시편 14편 다윗의 고백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과 다윗,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 코스를 밟았고 하나님을 향한 특심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사이면서 예술가이면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유다왕조를 세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다른 우월감을 자랑하기는 커녕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보자마자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음이로다”(사6:5)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 다른 민족과 다르다는 우월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우월한 자부심을 갖지 않은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배달의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만 영혼이 있고, 다른 민족에게는 영혼이 없다. 유대인들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심판 받는다’  

2:17-20절에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근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17)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했습니다.(18)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선악의 기준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으로 자부했습니다.(19) 세상 모든 민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성경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세오경을 암송했습니다. 머리가 안 좋은 사람은 신명기를 암송했습니다. 책 제목을 외운 것이 아니라 책 본문을 암송했습니다. 스스로를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사람, 어리석은 자의 교사로 자랑할 만합니다.(20)
문제는 자부심과 실제 생활이 다른 것입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21)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남의 것을 훔쳤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간음을 행했습니다.(22) 우상을 가증이 여긴다 말하면서 이방 신전에 들어가서 금으로 도금한 우상들을 훔쳤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23)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들을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24)
나의 자부심, 나의 타이틀이 빛을 발하려면 그에 걸맞는 삶이 따라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배지가 빛을 발하려면 국민을 위한 의정활동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개의원’이라며 모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리키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이들보다 우월한 인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그 자리는 꼰대라고 모독 받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목자의 타이들도 그러합니다. 목자,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생명의 구원자, 영혼의 감독,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먼저 자기를 가르치지 않으면 양들의 목을 조르고 영혼을 망치는 자, 영원토록 저주 받을 자로 모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나름대로 자랑할 구석이 있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였습니다. 당시에는 항생제나 마취제 같은 것들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고통이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생살을 베어낼 정도로 아픔을 치루었다. 이 정도 아픔을 치룬 민족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들의 자부심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들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의 입구에 서서 할례검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은 어떤 유대인이 죽어서 헤매다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왔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를 막고 깨우쳐준다는 것입니다. “형제여 번지수가 틀렸네, 자기가 들어갈 곳은 저기 천국이라네”
할례는 본래 율법의 보조 역할이었습니다.(25)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할례를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만 행한다면, 할례의 의미는 빛을 잃고 맙니다. 만약 할례 없이도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할례 받은 사람처럼 여기실 것입니다.(26) 만약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 조문을 알고 할례까지 했으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27)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원의 표식을 삼고 싶어하는 인간들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천사와 악마,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복잡한 존재입니다. 어떤 때에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득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파괴적인 죄의 소욕에 휩싸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고, 어떤 때에는 땅속 깊숙이 잠수를 타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도 나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관상을 통해 인간의 속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아세요? 응! 그냥 척보면 알아!’ 혹은 몇마디 말을 해보면 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 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이모씨로 발표되자, 이전에 그를 알았던 주민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경찰이 잘못하고 있다’며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병원 심방을 갔는데, 체온계를 이마 근처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측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계처럼, 가슴 혹은 머리에 가까이 대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아야 사람입니다.’ ‘목자의 심정 30, 정상수치에서 매우 처져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이렇게 평가해주는 장치가 있다면 신앙생활이 클리어해질 것 같습니다. 내 영혼의 상태가 보이지 않으니,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표시, 하나님의 영광을 예약했다는 표시를 가졌다면, 영적으로 긴장할 필요도 없고 치열하게 내적 싸움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의 티켓같은 것이 있다면 자유롭게 마음껏 살 것 같습니다. 마치 가인의 후손 라멕이 가인의 표를 심판면제를 받은 티켓처럼 여기고 마음대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오류에 강하게 휩쓸린 시기가 있었습니다. 사제가 주는 세례와 성찬을 구원의 표처럼 생각했습니다. 면죄부를 구원의 표식으로 팔기도 했고, 방언을 구원과 영성의 표시로 내세우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닙니다.(28) 표면적 유대인이란 ‘무늬만 신자’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증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 신앙생활 10년차야, 20년차야, 난 모태신앙이야’ 겉으로 드러난 경력이 하나님 나라를 보증해주는 티켓이 될 수 없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는 말씀은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어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만난 위기중의 하나는 ‘무늬를 중요시하는 신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대형교회로의 쏠림현상이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20세기에는 개척 교회에서 복음역사의 일군이 되어 좌충우돌하면서 연단도 받고 실제적인 믿음을 체험하는 것을 축복으로 아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모습을 시설도 열악하고 요구받는 것도 많고 사람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어려운 구차한 신앙생활로 보는 시각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쿨하게 신앙생활하고자 대형교회로 몰려가는 분위기입니다. 신자는 많은데,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신앙의 구경꾼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표면적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이 표면적 유대인으로 끝나버린 것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할례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한번 고생하고 끝나면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마음의 할례는 했는지 안했는지 드러나지 않으며, 한번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1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 마음에서 끊임없이 죄악이 올라옵니다. 어제 비방하는 말을 회개했는데 오늘 음란의 죄가 올라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앙의 년수를 더할수록 이전보다 더 무거운 현실문제를 타고 들어오는 염려와 두려움과 탐욕이 물리치기 위해 더더욱 깨어있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사람은 형식주의와 외식에 빠져 딱딱해지고 맙니다.
오직 이면적 기독교인은 마음을 찢고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고 회개합니다. 회개는 자기 유익과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향해 앞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로 번민할 때에 두려움을 찢고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인간갈등이 부딪혀 올 때,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섭리와 주권 편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한번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의 칼을 진실하게 내 영혼 깊숙이 들이미는 것입니다. 회개의 과정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시 한번 믿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참된 마음의 할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죄사함의 기쁨을 주시고 성령의 감동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목자들에게는 말씀의 권세를 덧입혀 주시고 한 영혼을 힘있게 돕게 하십니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나갈 은혜와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습관적,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표면적 신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앞에서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할례가 구원의 표시가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유대인의 나음은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범사에 많습니다.(2) 우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이는 밥통의 주걱을 쥐어준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걱을 쥐고 있으니 구원의 밥통을 열어 얼마든지 먹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먹지도 않고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실패인 것입니까!(3)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었습니다. 아담은 에덴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에게 반역했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은 받은 바 은혜를 잊고 감사하지 않으며 틈만 나면 자기 영광을 구하며 반역했습니다. 구약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섭리로 바꾸사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시기심으로 요셉을 팔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요셉을 연단하고 큰 민족을 이룰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욕심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겼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사 인류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어떤 이들이 주장합니다. 인간의 죄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면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요(6) 그렇다면 노아시대 홍수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 불심판도 다 잘못된 것입니다. 지옥의 심판이 있어도 안됩니다. 7절 말씀은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복음증거자를 향해 비꼬듯이 내뱉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내가 거짓말을 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해! 오히려 상을 받아야지!‘ 은혜의 복음? 말도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논리로만 따져보면 그럴싸하지만, 관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정죄받아야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사고를 내자, 아빠가 아들 대신 댓가를 지불하고 모든 뒷감당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용서받고 아버지는 자상한 아버지, 능력 많은 아버지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내가 앞으로 더 큰 죄를 지어 아버지의 자상함과 능력을 더욱 크게 드러내야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식이 아니라 정신 나간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와 같이 복음의 원리는 논리로 따질 것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용서해준다고 하셨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네! 죄를 지을수록 은혜가 더욱 커지니 잘 되었네!’ 이런 논리로 풀고자 하면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 논리를 고집하는 자들은 아무리 은혜로운 복음을 들어도 끝없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뿐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보다 조그마한 자기 의에 갇혀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합니다. 복음은 겸손히 죄인임을 인정하고 해결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 생명의 복음, 영광의 복음으로 와 닿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인간이 중력의 지배 아래 사는 것처럼, 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10-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 말씀은 10절, 12절 두 번 강조되었습니다. 없다는 말씀은 총 4번 나옵니다. ‘나는 죄인인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에 수많은 사람가운데 날개 없는 천사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신앙생활 초기에 가졌던 물음표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년수를 더할수록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제 자신을 보니, 이전에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속사람이 어떠합니까! 바울은 13-18절 말씀으로 인간의 죄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바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시편과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13) (시5:9절) 열린 무덤에서 시체가 썩어 악취가 올라오듯이, 더러운 생각, 악한 생각들이 마음속 밑바닥에서 꾸역꾸역 올라옵니다.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시140:3절)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키지 않고 뒤집기를 잘하며, 사람을 파괴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14) (시10:7) 격려하는 말보다 악플 달기를 좋아하고 남이 잘되는 것보다 무너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고(15) (사59:7),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으며(16).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17) 그들은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18) (시36:1) 이것이 유대인들을 향해 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너무 어둡고 비판적으로 보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고 기분 나쁘게 들릴지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진리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추하고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으로 치명적인 환경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원의 위기, 윤리와 도덕의 위기, 인간성 상실의 위기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매일 뉴스에 올라오는 기사를 보지 않더라도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보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입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줄을 우리는 매순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합니다.(19) 율법의 기준으로 따지면 하나님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20) 율법으로는 단지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구원자를 만나지 못하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놀라운 과학문명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30년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앞으로 30년 후에는 지금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과거인이나 현대인이나 미래인이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용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은혜와 진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나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도 그러합니다.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러 나아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구원의 빛, 용서의 빛, 희망의 빛이 나와 세상을 비추어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허물과 실수를 반복하는 영혼들을 먹이는 목자의 길에 서서 묵묵히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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