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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1-24 (일) 12:34
분 류 로마서
첨부#1 2019년_로마서제8강-1.hwp (29KB) (Down: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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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8강]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라

2019년 로마서 제 8 강  
말씀 : 로마서 6:1-23
요절 : 로마서 6:19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6장부터는 구원 이후 신자들이 가져야 삶의 방향과 영적 싸움, 소위 성화에 대해 말씀합니다. 로마서를 기계적으로 분석한다면, 구원에 관한 본문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전체 16장에서 1/4정도입니다. 분량만 놓고 따져보아도 구원 이후 성화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며 구원 이후 더 많은 영적 갈등과 싸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성화보다 ‘구원’입니다. ‘구원받았어요? 언제요? 그때 어떤 체험이 있었어요?’ 만약 구원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아마 십자가 우편강도는 가장 아이디얼한 신앙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구원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 구원열차를 타고 예수님과 함께 제일 먼저 낙원에 들어갔으니, 최고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우편강도 본인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좀 더 일찍 구원해주시어 제게 성장하고 열매 맺을 시간을 주셨다면 좋았겠습니다!’ 성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쉬움 또는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면, 죄가 많을수록 은혜가 넘치기에 부러워 보입니다.(5:20)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예수님 믿은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감동을 주고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나의 신앙여정을 밋밋하게 보이게 합니다. 특히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와 부모들의 집중마크를 받으며 크게 사고 치지 않고 자란 2세들은 밖에 나가서 사고 좀 치고 확실하게 죄를 짓고 돌아와야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1)

2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외칩니다.(2) 우리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11절까지 ‘죽었다’라는 말씀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죄를 죽였다 혹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죄로 인해 정죄 받아 죽은 자들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은 죄는 우리를 심판에 이르게 할 만큼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리도 많은 죄를 지은 것입니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죄 많은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을 자세히 되돌아보면 입으로, 생각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 수없이 죄를 짓습니다. 다만 조그마한 거짓말에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애통하기도 하고,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어버리고 수십억 사기를 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아가기도 하는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죄는 지을수록 그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담배를 멀리하는 사람이 담배냄새에 예민한 것처럼, 죄를 멀리할수록 죄에 대해 예민하게 깨닫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를 주도했던 진젠돌프백작은 8살에 회심했습니다. 무도회에 갔다가 여인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는데, 그때 자기안에 있는 정욕의 죄를 깨닫고 탄식하며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든지 그러하지 못하든지, 우리의 죄는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또다른 죄사함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넘치도록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당시 로마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례의식은 물에 푹 잠겼다가 꺼내는 침례였습니다. 물에 푹 담그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같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4) 물에 잠겼으면 다시 올라옵니다. 이는 이전의 삶과 다른 새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 구원받은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받아들이고 이전과 다른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5)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6) 하나님을 대적하던 나, 죄의 쾌락을 좇아 심판을 향해 달려가던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전의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지금의 나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7)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여기에 몰입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방탕하게 살았던 어거스틴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길을 가다가 옛날에 놀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어거스틴이 못본 척하고 지나가자, 여인이 좇아와서 따졌습니다. ‘저예요, 왜 모른 척하고 지나가지요?’ 어거스틴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너지만, 나는 이전의 어거스틴이 아니다. 그는 죽고 이제 나는 새 사람이다’ 한국의 무디라 불리는 김익두 목사님이 있습니다. 깡패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사람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故김익두’.’ 그러자 시장 사람들이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한번 시험해보자’며 지나가던 김익두 목사님에게 찬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전 김익두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벌써 죽었다.”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면 같이 살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니 새 인생을 향해 출발해야 합니다. 80% 정도 믿는 것이 아니라 100% 믿어야 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것이며,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항상 살아계신 것입니다.(10)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 것처럼, 죄와 죽음도 다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 이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영적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게으르게 살아온 사람은 예수님 믿고도 상당 기간 동안 게으름의 관성을 따라 삽니다. 이기적인 성향,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사람마다 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몸의 사욕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따라 살고 있다는 영적 정체성을 공격합니다. 어떤 형제는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또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에 대해 절망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는 것일까! 나 같은 자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신앙양심을 타고 들어오는 정죄감으로 이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져서 괴로웠습니다. 사탄은 허물과 실수를 통해 고소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때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이 그를 원망과 불신에 빠지지 아니하고 믿음위에 굳게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라 이는 확신싸움을 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은 중요한 시합을 맞이할수록 반복하여 위너의 자리에 서는 상상을 연습한다고 합니다. ‘나는 영광을 얻게 될 사람’이라는 확신이 치열한 경쟁을 타고 들어오는 두려움과 긴장, 염려와 불안을 물리치고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훈련도 감당할 수 있는 동기가 되어줍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확신하는 것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는 비결, 한 영혼을 믿음위에 세우는 목자의 비결도 확신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만 보고 요동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빛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을 확신하고 그 확신싸움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들이 태어나서 아빠가 되었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분은 아버지로 바뀌었는데, 내 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보며 사랑스런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나의 청년의 날은 이렇게 죽는구나!’ 탄식 했습니다.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답지 않은 나의 모습은 많은 시행착오와 혼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필요했던 것은 좋은 아빠로 살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싸움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간절하게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싸움속에서 총각 베드로는 죽고 아빠 베드로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인가 조금 개념을 가진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지금 경성의 목자라는 신분도 제게는 무척 낯설고 어렵습니다. 신분은 목자이지만 삶은 목자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확신을 놓치지 아니하고 인내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싸움의 끝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배’,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세력이며, 몸의 사욕을 통해 우리를 끌고 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마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나의 의지로 이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나의 의지로 저런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내 마음대로 얼마든지 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정욕의 쾌락을 좇아 죄를 지으면, 정욕은 그때부터 나를 지배하려고 달려듭니다. 몸의 사욕을 타고 들어와서 또다시 정욕의 죄를 짓는 세계로 끌고 갑니다. 교만의 죄, 욕심의 죄, 시기심의 죄, 미움의 죄도 그러합니다. 교만의 죄에 빠진 사람은 교만으로 인해 관계성이 파괴되고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절로 교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미움의 죄도 그러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미움을 놔두면 점점 더 큰 세력을 형성하여 나중에는 모든 은혜를 갉아먹고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끌고 갑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회개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자신을 붙들어 맴으로써 죄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몸부림치는 싸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죄를 물리치는 결정적인 비결은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3절 말씀은 ‘어디에 드려지느냐’가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무기가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테러의 도구가 되고, 경찰의 손에 쥐어지면 악을 제어하는 의의 도구가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 지체는 어디에 드려지느냐에 따라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고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도구로 드려지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중간 경계지점에 서 있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의의 무기가 되든지 불의의 무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무기로 쓰임 받지 않으면 죄에게 내주어 불의의 무기로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안일하게 현상유지만 하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점점 타락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에 잡아먹혀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한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귀신이 들어와서 집을 엉망으로 망쳐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귀신을 쫓아내고 깨끗이 청소하여 새 집으로 꾸며놓았습니다. 문제는 주인 없이 빈 집으로 놔둔 것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쫓겨났던 귀신이 노숙자처럼 떠돌다가 갈 데 없어 다시 돌아와 보니까 그 집이 비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깨끗이 청소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와, 이게 웬떡이냐!’ 귀신은 동료 노숙자 귀신들을 여섯이나 데려와서 그 집에 살림을 차리고 말았습니다.(눅11:24-26) 이전보다 더욱 비참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결국이 그와 같습니다.  
바울은 ‘내주지 말고 드리라’고 했습니다. ‘내주지 말라’ 죄가 우리 몸을 점령하고자 끊임없이 공격해오는데, 점령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은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합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유혹은 우리 본성에 가깝고 하나님의 영광은 본성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거룩한 생각, 영적인 열정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두운 생각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자기를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믿음위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정욕의 유혹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고 말씀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했습니다. 죄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는 가장 좋은 비결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돕고 섬기는 것은 의의 무기로 자신을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양을 돕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영적 연단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의 무기로 쓰임받을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에 힘쓰면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14) 왕자처럼 살아온 사람이 낮아져서 양을 섬기려면 스트레스를 받아 망가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에 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15) 거듭났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을 죄의 소욕에 맡기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16) ‘할례를 하였네, 안식일을 지켰네, 세례받았네’, 그런 겉모습으로 자족할 수 없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면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또한 본래 죄의 종이었습니다.(17) 죄를 죄로 알지도 않았고, 죄를 알아도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정욕의 죄, 교만의 죄, 욕심과 미움의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운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18)

그러므로 죄와 싸우고 거룩함에 이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예수님을 알기 전, 로마성도들은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뭔가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죽어라고 투쟁했습니다. 어떤 이는 게임의 즐거움에 빠져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미움과 상처의 독을 품고 이를 갈며 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없이 그렇게 죽 살다가 마쳤을 인생입니다. 그랬던 우리를 이제는 의의 종으로 삼으사 거룩함에 이르는 인생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그때의 간절함,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다닌 열정으로 말씀을 사모하라고 말씀입니다. 게임의 세계를 파고든 열정으로 기도의 세계에 몰입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저주하였던 것만큼 이제는 한 영혼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15-22절까지 반복하여 ‘이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망, 의, 거룩함‘, ’이르다’라는 말씀은 점점 자라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나 하나님의 종으로 사나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마치 피아노를 연습하는 사람과 연습하지 않는 사람이 처음에는 모두 못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십년이 지나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도달해있습니다. 날마다 노력한 사람은 피아니스트가 되어있고, 그냥 빈둥거린 사람은 겨우 독수리 타법으로 딩동거리게 됩니다. 영적 세계도 그와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소감 쓰며 투쟁하는 사람이나 소감 쓰지 않고 대충 적당히 사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한 명의 양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나 자기 문제 해결에만 올인하며 사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적 투쟁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훨씬 좋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삶의 여정을 걸어갈수록 점점 차이가 납니다. 세상에 타협하고 죄의 유혹대로 끌려다니는 사람은 점점 부정과 불법을 행하며 불법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에는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완악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반면 말씀에 기초하여 작은 죄라도 회개하며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고자 애쓰는 사람은 점점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세상 풍조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 문제를 감당하는 것은 경한 일이요 다른 이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고난중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보석같은 사람들로 성장합니다. 우리가운데 많은 보석들이 있습니다. 원석에서 보석으로 빚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세상 어디에서 이처럼 보석같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면 이것만큼 놀라운 변화가 어디에 있으며, 이만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왔습니다.(20) 은혜, 진리, 용서, 사랑, 하나님의 영광, 아무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21)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삶이었고 그 마지막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22)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음란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거룩에 이르는 신앙여정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기고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복있는 사람이며, 승자의 길, 영광의 길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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