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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5-29 (일) 13:06
분 류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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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11강]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2016년 사도행전 제11강                                                                   이인구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말씀/ 사도행전 11:19-12:25
 요절/ 사도행전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시대가 어려울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요사이 같이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서 교회는 많지만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파수꾼이 되지 못하는 때 초대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본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를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와는 달리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교회로 세계선교 센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서 좋은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안디옥교회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임이 어떤 교회로 성장해야만 하는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일어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방지역으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터키 남부지방으로서 당시 인구가 50만명이나 되는 국제도시였습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로 ‘동양의 로마’라 불리웠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재된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신혼여행을 올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명이 화려하게 발달된 반면에 향락과 사치가 만연하여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고대의 ‘아스타르테’와 로마의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큰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사제들은 모두 창녀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향락적이고 음란한 도시까지 피신 온 성도들은 죄악된 이방문화에 절망하거나 아니면 동화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가슴에 간직한 이들은 타락한 문화 속에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그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다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고상한 철학과 사상을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적인 배경이 없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고 당돌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핍박을 피해 온 궁핍한 피난민이었지만 헬라인들은 화려한 도시에서 부유하고 고상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 속에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이 약소국에서 온 피난민이 아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증인임을 깨닫고 담대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고상한 헬라철학도, 화려한 삶의 즐거움도 몰랐지만 단순히 자신을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증거했습니다.
 믿음으로 복음의 피를 뿌릴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단지 사회에서 소외된 한두 명이 아닌 수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수많은 헬라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어떤 특별히 설교 잘하는 사람이나 어떤 특별히 능력 많은 사람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피해 도피해온 이름 없는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했을 때 안디옥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설립은 기독교 역사상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빌립에 의해 전도된 사마리아인들은 반 유대인 반 이방인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0:2)로서 유대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안디옥에서 전도된 이들은 순수한 이방인들로서 최초로 복음과 접촉한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예수님의 유언적 말씀이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좁은 유대 땅에서 유다이즘에 갇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해 제자들을 변화시키시고 환난가운데 흩으시고 또 이름 없는 평신도들을 쓰셔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세상역사를 움직이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안디옥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서둘러서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열두 사도도 아니요 일곱 집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파송은 진정 신의 한수였습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으로서 헬라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가 설 때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고 또 사울이 돌이킨 후에도 모든 사도들이 그를 부담스러워할 때 그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깨닫고 사도들과의 만남에 중재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파송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율법을 재정비하거나 모든 신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공동생활을 하게 하거나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자유롭고 현실적인 이방신자들이 숨이 막혀 떠났을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했습니다. 그는 어떤 외적 형식보다도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는 개인신앙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복음역사의 주체가 되지 않고 성령께서 주인이 되셔서 신자들을 잘 이끌어 나가시도록  옆에서 조력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바나바를 가리켜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하면 흔히 흥부를 떠올립니다. 어릴 때는 놀부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흥부처럼 양보하며 착하게 살면 하늘에서 금은보화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흥부처럼 너무 착해 양보만 하다 자기 권리와 유익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취급하고 무시합니다. 나쁜 남자 놀부처럼 자기 권리와 유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는 사람을 더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그래서 음식점도 흥부집은 없지만 놀부집은 계속 번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한 경쟁사회에서 착해질 수 있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착한 것은 단지 타고난 성격보다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함으로 착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돈스럽고 어둡게 보여도 세상역사를 선한 뜻 가운데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때 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깨닫고 성령 충만할 때 착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때 바나바처럼 하나님역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헌신할 수 있고 또 동역자와 양들을 위해 섬기고 양보하는 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지도자 바나바의 영향력으로 인해 더 큰 무리가 주께로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모임이든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축복하시는 모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바나바처럼 자신은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순수하고 진실되게 양들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숨은 일군들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이삭 목자님 가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 역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 헌신해 왔습니다. 바나바처럼 병들고 연약하고 문제 많은 양과 목자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며 섬겨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가운데 캄보디아로 떠나시는데 그 곳에서도 고통 받는 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섬기고 세우는 귀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의 헌신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성도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부흥하게 되면서 바나바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바나바는 갈수록 넘쳐나는 양들을 볼 때 자기혼자의 힘으로 이들을 다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다소에 머물고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그의 고향인 다소에서 거의 10년을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과거에 복음을 핍박했던 사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행9:29,30) 유대에서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길 정도로 위험했던(행9:23) 사울이 이방 땅인 안디옥에서 복음역사를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울은 헬라지방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기 때문에 헬라양들을 돕기에는 최적의 목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푯대를 향해 타협 없이 돌진하는 강한 성격의 사울이 왔을 때 사람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섬세한 바나바의 지도력과 부딪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도력이 부딪힐 때 오히려 교회가 분란에 빠지고 양들이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울이 안디옥교회로 왔을 때 바나바는 상대적으로 비교되고 심지어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는 13km나 떨어져 있는 다소에 가서 은둔해 있는 사울을 찾았습니다. (다소전체가 사울의 집이 아니므로 다소의 수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마침내 그를 만나 설득했습니다.) 영적으로 자신이 훨씬 선배였지만 먼저 찾아가서 사울을 설득해 데리고 와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함께 동역하며 양들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보다도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택한 그릇임을 깨닫고 그가 역사의 전면에 서서 복음역사를 섬기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 부모형제까지 죽이는 정치판은 말할 것 없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며 분열하는 종교지도자들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동역의 역사가 가능했을까요? 사람들이 동역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뜻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육신의 가장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복음역사를 열심히 섬기는 신자들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죄악된 본성입니다. 어떻게 이런 본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자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자기 영광이냐 하나님 영광이냐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신자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바나바는 자기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삶으로 자신의 처지에 관계없이 안디옥 교회 양들에게 가장 적합한 목자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고집스런 성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변하지 않는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중심이 될 때 동역자의 단점과 나와 안 맞는 모습을 보기보다 그 사람의 위대한 장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역자와 나의 공통점을 찾게 되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고, 나와 정반대의 모습을 찾게 되면 나의 성격을 보완할 수 있다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될 때 동역자의 나와 공통점뿐 아니라 다른 점도 합심해서 선을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장점이 됩니다. 바나바가 어머니처럼 성도들을 위로하고 섬기며 세우는 직분이라면 사울은 아버지처럼 진리 편에 서서 죄와 싸우며 인도하는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성격은 서로 정반대로 달랐지만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중심이 될 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바나바가 먼저 적극적으로 사울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안디옥 교회의 동역은 없었을 것입니다. 동역자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make friends”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키우고 개발하는 데는 실로 눈물겨운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동역자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쏟고 정성을 쏟고 시간과 진심을 쏟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왜 동역자가 없는가? 왜 마음에 맞는 친구가 없는가? 나의 동역자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불평하고 슬퍼하며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상대방이 먼저 내게 찾아와서 나를 인정해주고 키워주고 섬겨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또 가정 교회에서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위대한 장점을 발견하고 동역함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한 기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에서 어떤 동역의 열매를 맺었습니까?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헬라인들은 지성적인 사람들이라 한두 번의 뜨거운 성령집회로는 복음이 잘 심겨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심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름 없는 평신도들에 의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안디옥 교회 성도가 되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생의 방향이 터닝되었지만 안디옥의 강한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물결 속에서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어느 순간 구원받기 전보다 더 비참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그러므로 깊이 있는 성경공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입니다. 때로 우리는 2000년 전에 씌여진 성경공부를 통해 한사람을 돕고 제자로 양성하는 것이 너무나 느리고 비생산적인 방법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의 많은 일을 대체하며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클릭 한번이면 성경전체가 각국의 언어로 뜨는 세상에서 매년 같은 말씀을 반복해 공부하고 그것도 부족해 봄과 가을에 고린도전서 15장과 히브리서 11장을 달달달 외우는 것이 비효율적인 방법처럼 보입니다. 뭔가 새롭고 재미있고 신비로운 방법을 통해 제자를 양성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책과 달리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진 책이므로 성경을 공부하면 하나님과 영으로 함께 호흡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줍니다. 또한 말씀이 심령에 새겨지게 될 때 그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소망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 때 우리의 체질이 달라지고 우리의 속사람이 조금씩 변화되어서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합심동역하여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안디옥 교회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 즉 ‘christian'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christian'의 뜻은 ‘a man of christ' 즉 ‘그리스도에 속한 자’ ‘그리스도를 닮은 자’란 뜻입니다. 처음에 그 명칭은 ‘예수께 미친 자’ ‘예수쟁이’ 같이 천대하는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예수님을 닮은 삶은 점차로 세상 속에서 영광스런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단지 1년 동안의 집중적인 성경공부를 통한 지식만으로 크리스찬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는 어릴 때부터 말씀을 공부했던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공부하면서 말씀을 삶에 적용해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직장생활하는 사람을 모두 크리스찬 직장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찬 직장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장의 삶속에서 적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직장생활가운데 예수님을 본받아 꾀부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일하며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인생의 매순간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떤 길로 가는 것인가? 묻고 말씀 속에서 답을 찾는 사람입니다.
 단지 주일에만 교회 다니며 평소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은 ‘christian’이 아니라 ‘Sunday christian' 또는 반쪽짜리 크리스찬입니다. 한 설교가는 “인생에서 확실히 불행해질 수 있는 조건은 반쪽짜리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말했습니다. 세상과 예수님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 같지만 결국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생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이들의 이중적인 삶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영광을 가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는 진정한 크리스찬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큰 흉년이 들게 됐습니다. 4년에 걸친 흉년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있던 성도들이 궁핍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이제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요한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영적으로 도와준 목자교회에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힘껏 도왔습니다. 흉년이라는 큰 외적 위기 속에서 이 두 교회는 섬김과 사랑으로 주안에서 더욱 곤고해지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12장 1,2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순교 때에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핍박이 있었으나 12장에서는 정치지도자에 의한 핍박이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헤롯왕은 예수님 탄생 때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한 잔인한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를 먼저 잡아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교회 최고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잡아 옥에 가두고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베드로까지 순교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던 전날 밤 하나님의 사자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두 파수꾼 사이에서 꼼짝없이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워 탈출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놀라워하면서 즉시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막상 베드로가 왔다는 여종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미쳤다고 하고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천사라고 반박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성도들은 베드로의 죽을 위기와 교회의 기초가 흔들릴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베드로를 구출해줄 것을 무작정 간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스데반과 야고보의 죽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베드로도 언젠가 순교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오히려 복음이 더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주권을 붙들고 당신의 뜻 가운데 베드로를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만약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 속에서 교회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을 간구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아직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신 뜻과 섭리가운데 능력으로 베드로를 불가능속에서 구출해내셨습니다. 신자가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깨닫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아직 응답이 없고 내면에 확신이 생기지 않을지라도 포기치 않고 끝까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0-25절에는 헤롯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교회의 부흥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과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헤롯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 관계개선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아부 작전으로 헤롯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그가 경기장에서 연설을 하는데 백성들은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이때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챘을 때 하나님은 헤롯을 치셔서 벌레에 먹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세상권세도 막강한 군사력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던 헤롯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역사는 더욱 흥왕하여 갔습니다. 세상역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지도자가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주관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는 원칙은 성경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맡은 신자들이 진정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어두운 세상과 죄악된 세상의 지배자들을 바라보며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역사의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살아갑니다. 그때 말씀이 세상역사를 이끌 능력이 아닌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얽매이는 율법이 됩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말씀의 종으로써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신자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속의 웅크리고 있는 눈을 들어 영적세계를 볼 수 있는 눈과 비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세상문제를 발견하게 도와주시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시고 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헤롯 같은 나쁜 정치지도자들 때문에 불안하고 전 세계적인 불황여파로 인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사람들은 비전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우리는 먼저 말씀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찾으며 시대의 파수꾼이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함으로 어두운 시대 안디옥교회를 개척했던 이름 없는 평신도들처럼 또 바나바와 사울처럼 하나님역사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가 어릴 때 세상을 잘 몰랐을 때 사람들은 성실하고 겸손한 저를 바나바같이 착한 남자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세상 환난 속에서 부딪히면서 세상 어둠의 세력을 알아나가며 어둡고 추한 내면의 죄가 드러나며 점차 바라바같은 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안디옥 같은 세상에서 인본주의와 쾌락주의 물질주의 속에서 말씀을 놓쳤을 때 수시로 바라바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부족한 죄인을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인도하시며 어두운 시대 말씀으로 하나님역사를 섬기는 바나바 같은 종으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말씀을 붙들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증인으로 사는 것에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저의 죄악된 본성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실천하고 증거하기 위해 매일 죄악된 자신의 본성과 싸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말씀의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안디옥교회는 이름 없는 성도들에 의해 세워지고 바나바와 사울이 그 기초를 닦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공부하고 실천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모임도 어느 곳보다 말씀을 많이 공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 모임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말씀을 삶 가운데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증거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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