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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5-31 (일) 12:58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마태복음_13강_메시지.hwp (29KB) (Down: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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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13강]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2020년 마태복음 제 13강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6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지난 주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엄마, 이게 꿈은 아니지” 아이들이 감격하고 아이 돌보느라 지친 부모도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코로나 환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이번 주가 고비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든지 당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등교, 당연하게 준비했던 여름수양회, 당연한 건강, 당연한 수업들이 한순간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상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따라다닐 때였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19)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그는 비린내 풍기는 어부 출신도 아니고 돈 냄새 풍기는 세리 출신도 아닙니다. 유대사회의 엘리트 서기관 출신 제자지망생이었습니다. 당근 두 팔 벌리고 환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잘 결단했어. 제자생활이 겉으로는 힘들어 보여도 알면 알수록 좋은 점이 한 둘이 아니야, 다른 제자들이 텃세를 부려도 조금 참고 견디면 좋은 동료가 될거야...”
그런데 예수님은 냉정하게 들리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베드로와 어부출신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소원을 심고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에게는 왜 이리 까칠하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제자생활의 동기를 바로잡고자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은 인기 많은 예수님을 따르다보면 자신 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 환호를 보내었습니다. 서기관 자신도 예수님을 따라가다보면 그런 능력과 권세를 얻고 사람들의 환호와 존경받는 자리에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길을 가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청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가십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그리스도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는데, 예수님은 만민구원역사를 향하여 가십니다. 그로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는 무서운 박해의 날이 옵니다. 제자생활의 동기가 사람들의 인정이나 세상의 영광을 얻는 데 있다면, 언젠가는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든지, 사람들의 욕을 먹고 비웃음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제자로 출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 감동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좋아서 출발합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웬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는 세상 모임과 다를 것 같아 마음을 열고 나아옵니다. 마치 밥상 위에 밥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반찬이 올려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반찬은 밥을 위해 있는 것처럼, 제자생활의 풍성함은 예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사명은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따라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회개하도록 도전해야 하고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헌신하도록 푸쉬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인정과 칭찬보다 갈등과 충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죄인이며,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성과 씨름하다보면 중보기도와 진심을 쏟아부은 사람에게서 오해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누구의 위로와 섬김도 힘이 되지 않는 머리 둘 곳 없는 그런 날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견디면서 점점 강해지고 순수해집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피난처요 소망이심을 알게 되며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각 사람이 날이 갈수록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제자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두 번째 제자지망생이 등장하여 간청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정말 효심이 갸륵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은 커녕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수많은 악플이 실시간으로 달렸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도 없냐? 장례 치루는 시간이 도대체 몇 분이나 걸린다고 그것조차 아깝다는 뜻이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할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여기에서는 어찌 이리도 야박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충격으로 와 닿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처로, 어떤 이들에게는 결단을 촉구하는 도전으로 와 닿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세상의 중요한 인간관계를 상징합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들이 있고 그런 관계와 제자생활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아가는 목자들은 부모나 형제들과의 끈끈한 관계와 선교사명의 충돌로 인해 마음고생을 합니다. 선교사뿐만 아니라 주와 복음역사를 절대적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충돌을 겪습니다. 집안의 요구나 가까운 사람들의 기대가 먼저인가? 제자의 부르심이 먼저인가? 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이나 취업같은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오면 어떠한 관계를 앞세우는가가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부르심을 앞세우는 사람은 사명을 중심으로 거처를 정하고 생활의 스케줄을 정합니다. 만약 제자의 부르심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라면, 그는 계속하여 부르심을 뒤로 미루어야 할 또다른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 장례가 끝나면 어머니 장례가 있습니다. 장례식 뿐만 아닙니다. 결혼식이 있고 자녀교육이 있고 중요한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지금 제자의 부르심을 먼저 앞세우는 사람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주와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학적인 대조법입니다. 죽음 아래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장례식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줄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줄 수 있습니다. 열매 맺고 생명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먼저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은 내가 줄 수 없는 것들을 내게 속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나와 나의 가족들과 자녀들과 양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거기에 최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다보면 자연스레 결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고 좀 더 진지해지면 결단할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이를 먹고 진지해지면 염려가 많아져 결단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자로 살고자 결단하는 사람이 우여곡절이 많고 허물과 실수가 산더미처럼 많을지라도 제자로 살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앞세우는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따라갑니다. 배는 바다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렸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모처럼 바닷바람을 맞은 제자들은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들떴습니다. 신이 난 베드로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었습니다. “나가 말이여, 이 바다에서 주님을 만났당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링케... 워매, 물고기들이 거시기하게 잡히는 거여, 그런디 그물속에 뛰어드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응게, 물고기들도 저리 목숨 걸구 말씀에 순종하는디..., 나는 물고기보다 못한 인간이구만! 하는 생각이 요기 양심을 찔러오더라구! 그래서 결단해부렀지...‘(눅5:1-10) 그런데  갑자기 배가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더니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었습니다.(24) 소문으로만 듣던 갈릴리바다의 광풍이었습니다.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고 집채만한 파도가 사정없이 뱃전을 두드렸습니다. 순식간에 배는 물로 가득하였고 침몰 직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히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은혜로왔던 베드로의 입에서 죽음의 공포가 튀어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쳤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인생여정의 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인생은 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항해와 같습니다. 인생 항해는 순풍에 돛단 듯이 평탄할 때도 있지만, 본문처럼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고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믿는 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통사고나 질병의 광풍을 만나기도 하고 지루한 소송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시험의 실패를 만나기도 하고 코로나같은 세계적인 재난을 광풍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광풍이 닥쳐올 때, 거짓 평화, 불안한 평화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고생 많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잠시 피곤했다.’ 이러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햐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책망하셨습니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광풍앞에서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음에도 죽을 줄 알고, 망할 줄 알고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풍같은 사고가 있을 때, ‘망했다. 끝났다, 희망이 없다’는 절망과 두려움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무기력과 절망으로 악수를 두어 더욱 문제를 꼬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때에는 시련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독수리보다 강한 영혼, 고래보다 깊이있는 영혼으로 빚고자 하시는 원대하신 뜻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믿는 자들에게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당신의 큰 그림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몰아칠 때에 입술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없는 말, 불신의 말을 내뱉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광풍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27)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예수님은 핍박과 박해의 광풍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박해를 이기고 온 세상 만민구원역사를 힘있게 섬겼습니다.
현대 교회는 육신주의 광풍, 물질주의 광풍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의 광풍은 선과 악의 개념, 도덕과 윤리의 기초까지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 세력을 보고 있노라면 두려움과 절망이 파고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들고 한계적인 상황가운데에서 항상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사를 볼 때 매서운 광풍이 때마다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의 광풍, 중세교회는 변질의 광풍, 근대 교회는 세속화의 광풍에 부딪혔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날까지 무너지지 아니하였고 줄기차게 생명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아무리 광풍이 강해도 예수님의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렵다, 끝났다’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긍정의 생각을 하고 비전의 말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풍랑을 헤치고 가버나움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몹시 사나운 그들로 인해 아무도 그 지경으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29)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며, 최후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먹잇감으로 삼은 영혼을 끝까지 붙잡아두려고 합니다. 악한 영이 얼마나 지독하고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은 밤낮 무덤에 거하면서 자기 몸을 자해하며 큰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악한 영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혼자 있어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살고 싶은데, 분노와 반발심과 미움과 상처를 다스릴 수 없어 고통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악의 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삶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의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영에 감동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건강한 영혼을 갖고 살아갑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마침 멀리서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30) 마가복음을 보면 2,000마리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두 사람에게서 떠나가는 조건으로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31)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내놓으라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왜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까! ‘입 닥치고 나가!’ 이리 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영적 세계의 원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악한 영들과 예수님 사이에 한가지 영적인 메시지가 오가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렇게 망가진 자들이 돼지 이천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까?” 예수님 또한 그러한 도전에 대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답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이들은 돼지 이천 마리보다 소중한 자들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세한이나 제임스처럼 훌륭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몹시 사나와서 아무도 상대할 수 없는 비행청소년 2명을 구하기 위해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할 수 있느냐는 물어온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도전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돼지만 아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도 아까지 않으셨습니다. 원수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두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희생을 치루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허락을 받은 귀신들은 두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은 귀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직장을 잃은 돼지치기 알바들이 놀라서 시내로 달려가 모든 일을 마을 주민들에게 보고했습니다.(33) 마을 주민들이 몰려와서 현장을 확인해보니 직원들의 보고 그대로였습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의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옆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가다라 지방의 문제아 두 사람이 정신 차리고 사람답게 변화되었습니다. 덩실 덩실 춤을 추며 구원의 능력자 예수님을 환영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34절을 보십시오.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들은 두 사람의 변화보다 잃어버린 돼지떼를 크게 보았습니다. 참으로 슬프고 어이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속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어떤 술꾼이 예수님 믿고 나서 방탕했던 생활과 술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술친구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너를 보면 예수님 안 믿고 싶어져. 너처럼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재미없게 살까봐 두려워서...” 그들은 허무와 무의미와 주체할 수 없는 정욕에서 구원받은 모습을 크게 여기기보다 술과 쾌락을 잃어버린 모습만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돈 귀한 줄 알면서 사람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를 보면 귀신들린 사람만 어둠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다라 사람들도 어둠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욕심에 붙잡혀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광인을 고치는 사건은 광풍사건과 비교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난이나 사고의 풍랑에서 건짐받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감격하고 놀랍니다. 질병에서 나음 받고 사고에서 보호받은 것에 대해 감동합니다. 신기해합니다. 그런데 죄의 바다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해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위대한 역사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체험보다 영적 가치관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특별한 체험이 없어서 제자로 살지 못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문의 가다라 사람들처럼 영적 가치관이 없기에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여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주위가운데 일어난 은혜의 체험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세상의 인정과 실리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당장 생활의 요구를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것을 앞세우는 순수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 되며 모든 것을 드려 따를만한 위대한 분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갑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과 가치관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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