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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2-10 (일) 12:43
분 류 이사야
첨부#1 2017년_성탄1강-1(이인구).hwp (64KB) (Down: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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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탄 제1강]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2017년 성탄 제1강                                                                  이인구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씀 이사야 7:1-25
 요절-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한 그리스도인이 일생 자신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봤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나 가파른 고개 길에는 오직 한사람의 발자국만 찍혀있고 평지와 낮은 구릉의 평안한 길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낮고 평탄한 길에서는 저와 동행해주시다 거칠고 가빠른 길에서는 저 혼자 걷게 하셨습니까?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가빠른 고개 길에서 네가 넘어져 절망하며 나를 찾을 때 난 너를 업어서 다녔고, 평탄한 길에서 네가 나를 찾지 않을 때에도 난 네 옆에서 너와 항상 동행했단다.” 나는 잊었을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연합군의 침공으로 두려워 떠는 남 유다왕 아하스에게 오셔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징조를 통해 어떤 위기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아하스는 불신가운데 하나님의 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을 믿고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항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더욱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BC734년경으로 남북이 나눠진 때로 남유다에서는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가 나라를 통치한지 2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20세 때 왕위에 올라 초기부터 바알신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몰렉을 숭배하여 자신의 자녀를 불살라 인신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역대하 28;2,3) 이런 죄악된 왕의 영향력아래 백성들도 하나님을 떠나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만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의 죄악을 책망하기 위해서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를 부지깽이로 쓰셨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북방에서 앗수르제국이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해 남방으로 확장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확장을 막기 위해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주변 다른 나라들(모압, 암몬, 에돔, 남유다)에게도 함께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왕 아하스는 오히려 친 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이러한 연합운동에 반대하면서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을 받게 됐습니다. 첫 침공 때 아하스는 이들과 싸워서 간신히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다시 침공하기 위해 동맹하여 예루살렘부근에 집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부근의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한 후 마지막 예루살렘앞에 집결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 함락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아하스왕과 백성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육이오를 체험한 세대들이 북한에서 핵을 만들었다고 하면 전쟁의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유다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그 아들 스알야습과 함께 윗못 수도 끝에 있는 아하스에게 보냈습니다. 아하스는 이스라엘 동맹군과의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물의 근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연합군을 막기 위해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중요한 만남에서 어린 스알야습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스알야습은 ‘남는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알야습을 통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하스와 그 백성들이 아무리 죄악으로 부패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치 않고 남는 자를 돌이키고자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지깽이는 불을 지필 때 쓰는 불쑤시개 나무로 결국은 타서 없어집니다. 제가 어릴 때 동네에서 말안듣고 말썽피우는 자식을 부지깽이로 때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의 죄에 분노해서 매를 들었지만 자식을 사랑함으로 강하게 때리면 부러지는 부지깽이를 사용하였습니다. 르신은 아람의 마지막 왕이요 베가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입니다. 이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후 결국 타서 없어지는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단결된 힘으로 아하스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다브엘의 아들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스스로 무너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가운데 65년 내에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이 패망하고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아람은 3년 후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12년 후 앗수르의 침략으로 망합니다. 65년 후 앗수르왕은 식민지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민족 이주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방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고 북이스라엘 땅엔 이민족들이 들어와 삶으로 이스라엘 민족자체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와 유다백성들은 부지깽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9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를 도와주시는 대신에 아하스왕에게 한 가지 조건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할 것이라.’ 나와 함께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굳게 서게 됩니다. 유다의 운명은 군사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 살 것이고 믿음이 없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때 두려움으로 포도주틀 뒤에서 밀타작 했던 기드온이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을 때 300명을 이끌고 미디안 군사 13만 오천 명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중심을 지켰을 때 앗수르 대군 185000명을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하스가 하나님을 굳게 믿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위기상황에 닥쳐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은 혈기로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 올려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거기에 맞서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은 예측불허의 성격으로 언제든지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습니다. 또 북방에서 떠오르는 강대국 중국은 시주석이 과거 진시황제처럼 권력을 장악하면서 강한 힘으로 남쪽으로 팽창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맞서 미국이 일본과 동맹해 우리나라에 사드를 설치하자 중국은 강력한 사드보복으로 자신의 심기를 건들면 얼마나 재미없고 무서운지 보여줬습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한 청년이 쏜 총탄 2발은 전 세계 천만명 이상의 목숨을 빼앗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긴장되는 시기에 지진까지 2번 연속으로 오면서 사람들을 더욱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국가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나와 나의 자녀들이 과연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염려가 들어옵니다. 장래문제, 건강과 직장과 자녀문제 등 수시로 불어오는 두려움의 바람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글같은 치열한 직장 경쟁 속에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장래 노후문제가 걱정되는데 자녀들은 공부하지 않고 놀고 있어 속이 타들어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세상 세력들은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연기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북한의 핵미사일도 부지깽이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깽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이사야 43;1,2)
11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하나님은 아하스가 하나님말씀을 붙들 믿음이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도록 징조를 구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징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초월적 증거입니다. 어떤 징조를 구하든지 그 징조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사시대 때 기드온은 미디안 대군과의 싸움 전에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징조를 구했습니다. 밤에 이슬이 내리는데 한번은 양털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셨고 또 한번은 양털뭉치에 이슬이 내리지 않고 다른 곳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는 징조를 보여주심으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히스기야에게는 앞으로 불치병이 나을 것이라는 징조로 해의 그림자가 십오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하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 무슨 징조든지 구하면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여 징조와 표적을 구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기 위해 징조를 구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한마디 성경말씀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인생의 위험 앞에서 어떤 말씀은 잠잠히 기다리라는 말씀이 있는 반면 어떤 말씀은 믿음으로 도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까?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자신 주변의 여러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징조를 보면서 하나님께의 인도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내면 확신을 얻고, 일상에서 나타나는 징조를 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고 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징조를 보여주셔도 ‘오늘은 기분도 꿀꿀한데 정말 이상한 일만 일어난다.’며 고개만 저을 뿐 돼지처럼 고집스럽게 자기 갈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믿음 있는 말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는 관계없이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때에 이렇게 먼저 찾아오셔서 도와주겠다고 하시는데 왜 아하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까? 아하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은 더디고 자기가 원하는 때에 ‘착착’ 이루어지지지 않을 것이라 불신했습니다. 반면 눈에 보이는 강대국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힘쓴다면 빠르고 확실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동맹군들이 침략을 시작할 때 이미 앗수르에게 사자를 보내어 도움요청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앗수르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금은보화도 성전에서 빼내어 준비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이사야가 스스로 한말인지 알 수 없었고) 또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을 위해 하신 말씀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셔도 믿음을 가질 수 없었고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돈이 더 문제를 쉽고 확실하게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시작됩니다. 설사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았다 해도 지금 나를 택하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붙든다면 믿음의 관계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가질 때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내일일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오 세상역사의 주관자로 믿는 우리를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하스의 불신에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와 유다백성을 다윗의 집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으로 괴로우셨지만 평생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을 생각하고 그 후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자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징조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세상에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어떻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친히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시오 생명을 지으신 생명의 근원으로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징조를 보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나라를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하스는 하나님의 주신 징조를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그는 본래의 자기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또 위기 속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이방신의 재단을 들여와 우상숭배를 가속화했습니다.(역대하 28;23) 하지만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믿고 의지한 것은 아하스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오판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이렇게 쓰게 된 앗수르의 굴레를 죽을 때까지 벗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는 유다의 바람대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지만 그것은 단지 유다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17절에서 25절까지는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아하스와 유대백성들이 겪게 되는 끔찍한 결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평소에 위험이 닥쳤을 때 피했던 골짜기와 바위틈조차도 앗수르 군대에게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전에 겪어 보지 못한 가공할만한 앗수르의 침략과 착취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남유다는 앗수르(벌)과 애굽(파리)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면서 교묘한 외교정책을 폈지만 오히려 남유다가 앗수르와 애굽의 격전지가 됨으로 큰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또 아하스가 연합군을 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요청한 앗수르 군대는 나중 남유다도 침략해 유다 땅은 수치를 당하고 착취되고 황폐하게 되어 경작이나 목축을 하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맙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인 임마누엘의 아기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당시 많은 이들은 이사야의 둘째 아들 ‘마할살랄하스바스’ 또는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700년 후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성령의 감동하심가운데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1-23) 하나님께서는 구원자의 징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없는 시대에서도 마침내 약속대로 구원자 예수님을 처녀(동정녀)인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 때문에 고통하는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개를 자식처럼 키우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작년에 저희 치과에 취직한 간호조무사는 취직한지 몇 달되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키우던 개가 나이 들어 실명되어서 곁에서 보살펴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개는 자신이 힘들고 외로울 때 항상 충성스럽게 옆에서 함께하며 위로해주고 기쁨을 줬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그 개가 마지막 가는 길 동안 함께 있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올해 취직한 치과위생사는 가족들과 같이 살다가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따로 살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따르는 큰 개와 같이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개가 주인의 모든 고민이나 슬픔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인과 함께 하기 때문에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개는 주인이 아무리 더럽고 못생기고 가난하고 이기적이고 욕심쟁이라도 심지어 학대하고 굶겨도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꼬리치며 달려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개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배우라고 주신 생명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니 평생 영원히 함께 하며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싸우며 심지어 헤어져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부부가 결혼해 첫아이를 품에 안으면 이 귀하고 아름다운 생명과 평생 함께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미운 7살이 되고 또 사춘기가 되면 같은 집에 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집니다. 가족조차 그런데 누가 부족하고 죄악된 (이기심 많고 탐욕적이고 게으르고 사악한) 자신과 평생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고독사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고독사는 통계없는 죽음으로 매년 약 천명이상이 아무도 모르게 외롭게 죽어갑니다. 이 세상에 홀로 왔다가 홀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지만, 처음 많은 이들의 축복받으며 태어났다가 마지막에는 소외되고 외롭게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인생이 많아집니다. 과거에는 아무 연고 없는 가난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중장년층과 청년층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수록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로 상대방에게 피해주기 싫어서 또 상대방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감당하기 싫어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을 택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섬겨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사실 고독사가 아니더라도 인생은 결국 혼자입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이들이 내 옆을 지나가지만 그들이 나의 모든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과 나의 문제를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누가 부족하고 죄악된 나와 평생 함께 하고 끝까지 동행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죄인과도 함께 하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일생 머리 둘 곳없이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더럽고 냄새나고 구질구질한 말구유에서 태어나 가장 치욕스럽고 부끄럽고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로마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알렉산더 대왕처럼 징기스칸처럼 또 슈퍼맨처럼 강한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악의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영광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면 될텐데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태어나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어떤 보잘 것 없는 사람, 어떤 더럽고 추한 죄인,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인생과도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하시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낮아져 섬기고 인도하시며 마침내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전등화의 유다백성과 아하스에게 오셔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징조를 받아들일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강대국의 식민지 백성의 처녀의 몸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징조를 드러내셨습니다. 누구도 처녀의 몸에서 또 말구유에서 태어난 구원자의 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육신을 입은 그 몸으로 선하신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육신으로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도 어떤 죄인도 믿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서 아무도 나와 함께 동행하는 이가 없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모습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최근 저에게 많은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이제 꽃다운 청년의 육체가 떠나가고 쇠락하는 중년의 몸으로 여러 스트레스가운데 얼마 전 갑상선항진증이 생겨 수시로 심장이 뛰고 피곤해졌습니다. 그런 중에 제 치과 맞은편 새 건물에 3,4층을 통합해 큰 치과가 들어왔습니다. 수련받은 2명의 치과의사가 비싼 월세와 개업비를 뽑기 위해 분명히 공격적으로 죽기 살기로 진료할 것이라는 치과기구상들의 말을 들은 제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습니다. 더구나 집의 고3이 되는 아들은 험한 세상에서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어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이제 인생의 열매를 맺을 나이에 이렇게 꺾여가는데 누가 나를 이해해주며 누가 나와 함께 할 수 있는가? 그런 중에 이 말씀을 맡게 됐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가장 깊이 체험한 것은 대학교 때 교통사고 후 병원에서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2번의 뇌수술 후 의사는 다시 학교에서 공부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고 의지할 수 없을 때 오직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일층 병원 대기실에 내려와 어두운 구석에서 성경책을 읽으며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현재의 고통도 장래의 걱정도 잊고 내면에는 알수 없는 평안함과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떤 어둡고 험한 세상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병원에서 퇴원해 학교에 다시 다니고 힘든 학창시절의 광야연단을 거쳐 기적적으로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되어 개업하고 목자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때만큼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동안 아하스처럼 예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예수님을 찾다가도 쉽고 평탄한 길에서는 예수님을 잊고 내 생각과 의지대로 죄에 매이며 죄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 인생의 어떤 때에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와 함께 하시며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죄로 인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저와 함께 하심으로 제가 영혼에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소리를 듣고 돌이키도록 도우셨습니다. 이제 제 인생가운데 항상 함께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과 끝까지 믿음으로 동행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둡고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세상 죄와 어둠에서 일어서 일생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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