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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2-01 (일) 12:41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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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9강] 바울의 탄식과 감사

2019년 로마서 제9강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

바울의 탄식과 감사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난 21일 외신들은 일제히 ‘방탄소년단 군대간다’는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한국 국방부가 대중문화예술인 병역특례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방탄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5조6,000억원이며, 사우디에서는 이슬람 율법을 완화시킬 정도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영향력을 생각하여 병역면제를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영향력을 생각하여 군대를 가야만 국방의 의무가 바로 세워진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법과 원칙이 우리 스스로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모습입니다.

신자가 겪는 대표적인 갈등중의 하나도 율법, 법과 원칙으로 인한 갈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이 처음 모임에 나왔을 때의 율법은 1주일에 한번만 성경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빼먹지 않으면, ‘세상 최고의 양’으로 목자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말공 한번으로는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며, 지켜야 할 법이 점점 늘어납니다. 주일예배, 소감, 일용할 양식입니다. 더욱 더 성장하면 십일조, 전도, 제자양성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아집니다. 과거에는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 몸이 끌리는 대로 움직였는데, 모니터로 이상한 영상을 보는 것부터 그만두어야 합니다. 거칠고 더러운 말도 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부인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법과 원칙이 늘어가는 것만큼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갈등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쁨 대신 져야 할 십자가와 하지 말아야 되는 굴레만 남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가 오면 ‘차라리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가 더 편했다’, ‘다 그만두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슬며시 찾아옵니다. 가치와 유익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할 율법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 결혼법에 기초하여 율법을 남편에 비유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늘날이야 남편과 아내가 쌍방 합의, 혹은 분명한 귀책사유를 이유로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시대는 모든 경제활동이나 사회적 지위가 남자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유대 율법은 남편에게만 이혼할 권리를 주고 아내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1) 여자가 남편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끔찍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일지도 종료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남편이 죽든지, 자기가 죽든지 누군가 죽어야만 결혼생활이 끝났습니다.(2) 만약 남편이 죽지 않았는데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핑계로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음녀가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3)
율법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남편이 아내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율법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울러 남편이 때로는 끔찍한 고통을 주는 것처럼, 율법도 때로는 끔찍한 고통을 줍니다. 영원히 헤어지고 싶을 정도로 죄의식이나 자책, 절망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럴지라도 아내 마음대로 남편과 헤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율법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이 죄의식과 두려움을 준다고 해서 율법을 거부하고 부모를 대적하고 간음하며 마음대로 살게 된다면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를 찾은 음녀처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율법이 필요하지만 율법으로 인해 고통당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고발하는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4) 그것은 단지 죄사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도록 하심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은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어 죽음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원래 율법은 죄의 정욕을 통제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육신가운데 있는 인간은 율법으로 죄의 정욕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율법은 죄의 정욕이 왕성해지는 통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욕의 죄를 짓고 나면 죄의식과 정죄감으로 뼈가 녹는 고통을 겪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합니다.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회개하고 나올 것 같은데,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같은 자는 용서받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집니다. 절망이 강력해지면 정욕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 그로인해 율법은 더 큰 죄의식을 안겨주고 더욱 절망하고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회개 대신 자포자기를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이 죄로부터 보호막이 되지 못하고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어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모든 얽매이는 것에 대하여 죽은 자들은 그런 코스로 달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는 것입니다. 할례 하라고 하니까 할례 하고 안식일 지키라고 하니까 지키는 것입니다. 지켰으면 구원, 지키지 못했으면 심판. 그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만약 가정생활에서 남편과 아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만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됩니까! ‘돈벌어! 밥해, 빨래해, 용돈 줘, 순종해!’,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들이지만, 그러한 문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거기에 담겨져야 하잖아요! 사랑과 희생과 배려와 존경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문자적으로만 오고가는 가정생활이라면 숨이 턱턱 막히고 죽음에 이르는 가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따지는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져오지 못하고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의 적용을 받는 새로운 방식을 말합니다. 율법 또한 성령의 새로운 적용을 받습니다.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보다 ‘하고 하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여 사람의 영혼 깊숙한 곳을 터치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율법이 나의 끔찍하고도 무서운 죄를 드러낼 때, 성령은 그를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한 피난처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통해 죄와 타협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도록 도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율법을 통해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끌어가기 위해 매순간 새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율법이 죄라고 해야 합니까!(7)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죄로 알지 못합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탐심을 죄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 기초해 본다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야 마땅한 바른생활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바울 마음 깊이 감추어졌던 탐심의 죄를 드러내었습니다. 계명이 없었다면 그는 탐심을 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성취동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그것이 탐심의 죄임을 드러내었습니다.
문제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운데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것입니다.(8) ‘기회를 타서’라고 말씀은 11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계명의 원래 목적과 전혀 다른 용도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 계명을 두신 것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영적 질서를 세우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선악과 계명은 ‘에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아담과 하와의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뱀은 기회를 타서 그 계명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에 대해 반발심을 갖는 도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계명을 어긴 후에는 두려움을 심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과 여자를 원망하며 모든 탓을 돌리는 악에 악을 더하도록 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망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죄는 생명을 주고자 했던 율법을 사망을 가져오는 도구로 바꾸어버리고자 도전해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아무 문제없이 살았는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9) 마치 검진을 받기 전에는 암이 있는 줄도 몰라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는데, 검진을 받아 암세포를 발견하니, 사망의 권세가 살아나고 평안히 살던 나는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받은 검진이 도리어 사망의 고통을 가져온 것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10)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계명이 문제가 아니라 죄가 문제입니다.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12) 다만 거기까지입니다. 율법 자체가 나를 살릴 능력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것이라도 사망의 고통을 가져왔으니 계명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13)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죽음의 고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있지 않으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모르니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산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면 결국에는 은혜도 모르게 됩니다. 율법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 ‘없이’ 살면 안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14-20절에는 ‘나’와 ‘죄’가 의인화되어 투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 육신 안에 있는 죄는 나를 정반대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그로인해 율법이 신령한 줄을 알면서도 육신에 속한 나는 죄 아래로 팔려갑니다.(14) 그래서 15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율법을 따라 하나님앞에 온전히 살고자 하지 않으면 15절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신분열증에 걸렸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말씀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이 말씀을 실감나게 체험합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희생적으로 살고 싶어 할수록,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욕망이 내 안에 가득 있음을 발견합니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고자 노력할수록 정욕의 세력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죄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와 같이 모습은 율법대로 살려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17)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18) 거룩하게 살고 싶은 소원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무능력하고 비참한 자기 모습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19) 소위 ‘자기 발견,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거룩하고 고상하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탐욕과 정욕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여전히 자기 잘난 맛에 큰소리치고 있다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20)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고 아무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고 죄에 대해 두려워하고 죄를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의 이론도 있고, 성악설을 주장하는 순자의 이론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이중성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그곳에도 악이 함께 있습니다. 이 선과 악은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힘을 다해 싸웁니다. 엎치락 뒷치락 치열하게 싸울수록 ‘나는 누구인가’ 혼돈에 빠져듭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본 회퍼 목사가 있습니다. 탁월한 목회자요 신학자입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감옥에 갇혀 사형당한 분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백시를 썼습니다.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갔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던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던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것처럼 불안하고 나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봅니다. 결국 바울 또한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탄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강력한 죄의 세력과 그 앞에 연약한 자기를 발견하는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갈수록,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할수록 이런 탄식에 이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세상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밤처럼 어두었습니다. 원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삶은 여전히 모순되고 자신은 어둠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율법 조문이 빛과 생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오래전 저와 성경공부했던 어떤 형제가 말씀공부를 하니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 같다며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쉬운 줄 알았는데, 성경을 공부해보니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목자보다 낫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말씀 앞에 진실하게 자신을 비추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적당히 분위기에 맞추어 사는 것으로 자족했다면 그만큼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말씀으로 자기 영혼을 진실하게 측량해보니 그런 고민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믿음의 수준을 높이고자 영적 씨름을 할 때에도 그런 고민이 찾아옵니다. 양에서 목동으로, 목동에서 목자로, 무리에서 제자로, 무엇보다 예수님을 온전히 배우고 따르고자 할 때 갈등에 부딪히고 고민스러워집니다.

바울은 그러한 고민과 탄식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방금까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모순된 모습으로 탄식했던 바울이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의지만 생각하면, 사람만 생각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8장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죄와의 일대일 싸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거룩한 싸움에 함께 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을 공급하십니다.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때마다 지혜와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나 홀로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니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저는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메시지의 짐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그런 탄식을 할수록 기도가 나옵니다. 나의 교만과 자신감이 죽는 그 때에 겸손히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본문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입술을 통해, 책을 통해 필요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나 혼자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엉터리같은 자가 말씀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생각하면 매번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사망에 이르는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글쓰기를 죽기처럼 싫어했던 사람을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감사찬송드립니다. 율법이 답이 아닙니다. 나의 고상한 소원이나 탁월한 능력이 답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답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영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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