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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4-27 (일) 13:08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14_마태12강-1(최동진).hwp (28KB) (Down: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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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12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014년 마태복음 제12강                                                                         최동진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세리 마태를 부르심으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죄인들을 치료해주기 위해 영적인 의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사랑과 은혜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큰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1-8)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다가 다시 고향 동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는 나아올 수 없는 중증 환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린 친구들의 믿음의 행동을 자세히 기록하며 그 믿음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그 자체가 큰 믿음임을 증거합니다. 병자와 그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아무리 심한 중풍병이라도 나음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b)" 안심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영접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고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 낫기를 바라고 나온 이 사람에게 왜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신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중풍병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의존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도 때로는 불평하고 원망하며, 상황 탓, 조건 탓을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절망과 운명주의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병만 나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힘든 일을 만나면 조건개선을 통해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바랍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은 외적으로 병이 나음 받으면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죄 사함 받는 것은 별로 큰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가장 시급한 근본문제를 죄로 보시고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먼저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병이 낫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이기적으로 만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고 파멸로 치닫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죄로 인해 사람이 연약하게 되고, 죄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립적인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병자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구원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통해 그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3) 마가복음을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편견과 무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4b,5)” 둘 다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당장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죄 사함은 증거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정도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가 이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코자 하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누워만 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침상을 들고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무리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8) 이로써 무리들은 사죄의 권세자이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 사함의 권세는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예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대한 사명을 소유한 존재요,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능력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먹고 마시고 쾌락을 추구하며 부패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죽어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또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실제로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외적인 변화가 나타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 조건에 얽매여 무기력한 인생,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 받음으로 일어나 걷는 새 인생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 자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세관은 마태의 직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동족들로부터 과다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일정액은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하여 돈을 모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세리를 창녀와 함께 공인된 죄인으로 취급하여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세리를 부르신 것입니까? 장애물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중풍병자와 달리 마태는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할만한 믿음을 보여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온전히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마태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공인된 죄인으로서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제자로 불러주실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고독과 슬픔과 절망과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과 후회하는 마음을 보시고 절망 가운데서도 빛을 찾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를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죄에서 구원 받고 인생 방향을 잘 잡기만 하면 진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돈을 위해 온 인생을 불살라 바쳤듯이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불태워 헌신하는 사명인이 될 희망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있기에 그가 구원 받은 새 인생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소망 가운데 “나를 따르라(9)” 부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자기를 위해 돈을 추구하는 죄악된 삶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자기를 중심한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배우는 진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그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든지 개의치 않으시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좇으며 배우는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시겠다는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은 마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머뭇거림 없이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계산하지 않고 세상 미련에 얽매이지 않고 죄악된 자기를 일방적인 은혜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자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면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고 잃었던 기쁨과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에 감격하여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베푸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맛있게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로써 천국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사랑과 영접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 잔치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천국잔치였습니다. 마태 한 사람의 변화는 공인된 죄인들 가운데 엄청난 영향을 미쳐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들의 율법적인 판단으로는 공인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아무리 명의라도 건강한 자에게는 쓸 데 없습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해 존재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서 건강한 자가 되도록 하는 데에 그 사명이 있습니다. 의사는 병자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하면 병을 고쳐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병만 고치면 본래대로 회복되어 건강한 삶을 살 것이라는 희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는 병자를 고쳐주어 새 인생을 살게 할 때 참된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영적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로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영적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상실하고 죄로 병든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멀리하였습니다. 이들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고 금식기도나 십일조도 제때 철저히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의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 죄인을 영접하지 못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었고 불쌍히 여기기보다 미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막상 도와야 할 병든 자들을 마음으로 잘라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바로 도와주려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긍휼은 사람을 살립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릴 때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내면을 치료해주셨습니다. 특히 세리 마태를 부르사 제자 삼으시고 3년 동안 동고동락하시며 섬세한 사랑으로 병든 그의 내면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리 마태는 살아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토니 캠폴로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는 파티입니다”라는 책에서 사랑과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아그네스라는 한 창녀를 위해 새벽 3시 반에 생일파티를 열어준 한 사건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새벽 3시 30분에 창녀들을 위해 생일 파티를 열어줄 수 있는 교회에 속해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엄숙한 경건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처음 이적을 행하신 곳도 가나의 혼인잔치였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황태자의 혼인잔치,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주최하는 파티에는 참석할 수 있는 자격 요건도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파티는 신분이나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다 영접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리나 죄인들과 같이 죄로 깊이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파티에 초청하시고 그들을 황태자와 황공주로 대접해 주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세상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히 누릴 수 있었고 이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따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목자로서 양들을 제자로 잘 키우고 열매 맺기 위해 좋은 방법을 찾고 능력을 얻는데 열심을 내기보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 죄로 병든 영혼을 품고 섬기면서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이들을 돕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캠퍼스에 죄로 병든 많은 양들이 있지만 정작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양들은 부담스러워 멀리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 영적 소원이 없는 양,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반발만 하는 양, 니고데모 족속, 중풍병자 족속, 사마리아 족속들을 한 사람씩 정죄하다보면 도울 양이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덧입을 때 죄로 병든 양도 주님의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잘 배워서 어느 누구든지 다 사랑으로 영접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고 고독한 영혼들이 다 나와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위로받고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기쁨이 넘치는 천국 잔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b)"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들을 불러 치료하사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보실 때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병든 자로 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을 섬겨 살리는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이 주님의 긍휼의 마음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죄로 병든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III.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14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열심히 하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는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혼인집 손님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낡은 잘못된 사고를 깨우쳐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성경은 예수님은 신랑이시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부로 비유합니다.(고후11:2) 신앙생활을 잘 하는 자는 전통과 관습을 좇아 규례를 잘 지키는 자가 아니요, 신랑 되신 예수님과 교제하며 기쁜 신앙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세상 욕심과 자기 이상이 주인이 되어 사명이 부담스럽고 기쁨이 사라질 때 금식하며 간절히 회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옛 것과 새 것이 합쳐질 수 없음을 가르쳐주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여기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복음을,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이나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마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사해주고 죄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회개함으로 굳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 마음과 새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새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에 힘쓰므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생명 구원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잘 모른 채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임의 시니어 목자로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많은 일을 하였고 시간이 나면 연초에 목표로 잡은 성경 3회독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다독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만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은 열심히 하였지만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섬김과 도움이 필요한 양을 앞에 두고도 나의 상태가 힘들다고 외면하는 자였습니다. 캠퍼스에 나아가도 바리새인의 눈으로 양들을 보니 한 양도 제대로 영접하고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롭게 배우고 순종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 해오던 익숙한 방식으로 역사를 섬기려 하였습니다. 그럴 때 저의 마음은 점점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자기 열심에 기초하여 많은 일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고 한 양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형식과 타성에 빠져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버린 마음을 회개합니다. 제가 날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말씀의 은혜를 새롭게 받고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새 가죽부대가 되어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어떤 양도 마음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목자의 심정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우리 모임이 날마다 새 가죽부대가 되어 세상에서 지치고 병든 영혼들이 다 나아와 쉼을 얻고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하나님의 천국잔치가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영적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과거 죄로 병들고 무기력한 삶을 살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제자로 삼아주시고 이 시대에 죄로 병든 영혼들을 섬기고 살리는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캠퍼스 양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가운데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생명 구원의 역사에 귀히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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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4강] 사탄아 물러가라 관리자 2014-02-09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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