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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9-18 (일) 10:44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27강-1.hwp (154KB) (Down: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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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27강]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2022년 누가복음 제27강                                                      오정훈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말씀/ 누가복음 15:1-32
요절/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차를 타고 가다보면 잃어버린 딸을 찾는 현수막이 시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는 그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애가 탈까요? 그리고 그토록 찾고자 하던 자식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크고 놀라울까요?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 인생들을 애타게 찾으시며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감격하여 맞이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집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한 영혼을 찾도록 찾는 선한 목자들로 쓰임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는 세금징수원이고 죄인들은 창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공인된 죄인들로서 유대인들에 의하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같이 식사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 이스마엘은 “악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마라. 심지어 그를 율법의 근처에 데려오지도 마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철저히 배척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잃어버린 영혼을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 마음을 알게 하고자 잃은 양 비유, 드라크마 비유,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첫째, <잃은 양 비유>
3,4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팔레스틴에서 양은 주된 재산이요 생계 수단으로 그 목초지는 대부분 남북을 잇는 해발 500미터의 중앙 고원지대에 형성되어 있어서 양이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3-4명의 목자가 한조가 되어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만약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서라도 그 잃은 것을 찾기까지 찾아 나섰습니다. 이는 목자에게 한 마리의 양은 1/100의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부모에게 모든 자식이 자기 생명처럼 하나하나 소중한 것과 같습니다. 양을 잃은 목자는 “고집 세고 말 안듣더니 잘 되었다. 실컷 고생이나 해 봐라” 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아 나섭니다.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온 산과 들로 밤새워서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낭떠러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양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5,6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5절의 ‘즐거워’라는 말씀은 ‘카이로’로서 기쁨이 넘쳐 노래를 부르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깨에 메고’라는 말씀은 아무리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로 간 양이라고 하더라도 ‘찾은 양’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며,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깃발과도 같이 온 동네에 내보이고 싶은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말 안듣고 제멋대로 하다가 길 잃은 양은 엉덩이를 때려주고 목에 줄을 메어 질질 끌고 와도 시원치 않을 판이지만 목자는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워서 어깨에 메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잔치를 벌임으로 그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는 99마리의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양이 그만큼 각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됨을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회개할 것 없는 99명의 의인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둘째, <드라크마 비유>
8절을 보십시오. 한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낼 때까지 찾았습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찾는 것일까요?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 곧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그렇게 큰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에 해당하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남자가 아내를 맞이할 때 결혼지참금으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 주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그것으로 머리를 장식하였고 잘 때도 이를 결코 풀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빚이 많아 채권자에게 집이 넘어가더라도 채권자는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 열 드라크마만큼은 압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이를 소중하게 여긴 것이며 열 드라크마에서 한 드라크마만 빠져도 결코 그 값을 할 수 없었기에 등불을 켜서 집안 구석구석을 쓸어서라도 찾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9절.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경제적 손익을 생각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보다 차라리 잃은 드라크마를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치킨 서너 마리에 과일만 좀 사도 벌써 한 드라크마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하는 것은 잃어버린 결혼기념물을 찾은 기쁨이 그만큼 크고도 또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십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정죄하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것보다 더 기쁘고 감동적인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비유에 나타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잃어버린 대상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찾았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우리는 조금 찾아보다가 찾지 못하면 포기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을 때까지 찾으십니다. 포기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때문에 소망 둘 수 없는 인생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이 찾은 바 되면 천국에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죄인들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고 그로 인해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과 은혜를 인해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셋째, <집나간 탕자의 비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1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 꼭 두 아들이 나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던 반면 둘째는 달랐습니다. 그는 Yolo(한번 밖에 없는 인생 최고로 즐기자)와 Flex(돈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를 추구하는 MZ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옷 입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 집 식구들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구멍이 뻥뻥 뚫린 청바지에 귀걸이를 하고 머리도 한 달에 한 번씩 빨주노초파남노 돌아가면서 화려하게 염색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고 양식 먹고 매주 말씀공부에 소감을 써야 하는 아버지 집의 생활이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로 가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며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먼 나라 그 아름다운 곳”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a) 당시 유산은 맏아들에게 2/3, 둘째에게 1/3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니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죽지 않을 만큼만 패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이 아버지는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아들의 요구대로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는 짓이 여차하면 사고칠 게 뻔한데 왜 아버지는 이렇게 나누어 준 것일까요? 기력이 쇠해서 다 큰 아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은 재산을 잃을지 몰라도 아들은 잃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집을 떠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결국은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방황과 실패를 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 후 며칠이 안되어’ 이 말은 둘째 아들에게 이미 계획이 다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버지가 땅도 주고 양과 소 가축도 주셨을 텐데 그는 이것을 순식간에 현금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간섭도 없고 무엇보다도 소감을 쓰지 않아도 되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물을 만난 물고기 모냥 그는 거기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오후나 되어서야 일어나 물좋은 클럽에 가서 술마시고 춤을 추며 창기들과 죄를 짓고 밤새도록 놀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데나리온코인에 투자하여 장래를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젊음을 불태우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은 너무나 재밌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허랑방탕한 삶은 얼마 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흥청망청하는 사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혹시나 해서 투자해 놓았던 데나리온 코인도 북쪽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폭락하여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돈 있을 때는 그렇게 많던 친구들이 돈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14절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얼마 전까지 길바닥에 돈을 뿌릴 정도로 흥청망청이었는데 이제 컵라면 하나 사 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궁핍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그는 3D 업종의 하나인 돼지치기로 취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농장은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곳이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먹고 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돼지같은 주인은 쥐엄열매도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였습니다. 그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한 며칠은 재밌고 이렇게 좋을 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그 지긋지긋한 소감도 안쓰니 정말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 없는 마음은 허망해지고 어두워져 갈 길 몰라 방황하게 됩니다. 그 허무함과 어두움을 채우기 위해 죄에 빠지므로 죄의 종으로 전락하여 그 내면은 심히 곤고해지게 됩니다.
이 지경에 이르자 그는 아버지 집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켜’란 말은 문자 그대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정신을 차렸다’는 뜻입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굶주림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을 만나서 또 어떤 사람은 사고나 질병을 만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잘 나갈 때 먹던 풀코스 요리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것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일까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양식이 풍족한’이란 말씀은 직역하면 ‘빵으로 둘러싸여 있는’이란 뜻입니다. 아버지 집은 빵으로 둘러싸여 있을 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였습니다. 양식도 풍족하고 말씀도 풍족하고 사랑도 풍족했습니다. 얼마나 풍족했든지 품꾼들조차도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 집이 얼마나 풍족한지 몰랐습니다. 하루 세끼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불평만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을 떠나서 쥐엄열매도 얻어먹지 못해 굶주리게 되자 비로소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18-20a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아버지께 얼마나 무례하게 행동했는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깨달았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요구했고 그 귀한 유산을 창기와 함께 모두 탕진해버렸습니다. 이러한 그의 죄는 아버지께 불효 불순종의 죄인 동시에 그렇게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으로 집에 가면 아버지가 크게 실망할 것이고 크게 혼날 수도 있었습니다. 형의 조롱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용기를 내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애통한 마음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주저앉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한편 집에 있는 아버지는 어떠합니까? 20b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어찌하든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날마다 동구 밖 어귀에 서서 목이 빠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지같은 행색을 하고 죽도 한 그릇 못 얻어먹었는지 축 늘어진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한 눈에 봐도 둘째가 분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덥석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아들의 눈에서도 그렇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떠한 책망이나 질책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열렬히 환영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의 허다와 죄와 허물을 다 덮어 버렸습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아들은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들도 양심은 있었는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둘째 아들을 어떻게 대우합니까? 22-24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서 아들로서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기쁨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로 인하여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통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얘, 너 돈 얼마나 썼니? 도대체 여자는 몇 명이나 만난 거냐?’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회개한 자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그 죄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맞이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십니다. 못난 짓만 하고 돌아왔으면 혼내주고 벌을 주어야 하지만 죄의 옷을 벗기고 가장 좋은 옷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반지를 끼워주시므로 품군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도 대우하여 주십니다.  이는 참으로 큰 은혜요 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은 죄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을 돌아오기만 하면 자녀로 영접하시고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날은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자기 생일도 아닌 그냥 지극히 평범한 날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이런 날 잔치를 벌이고 풍악을 울리는 것은 살면서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의아하여 무슨 일이 있는가 종에게 물어보니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뭬야 그 미친놈이 돌아왔다고” 그는 노하여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들어가자고 권하였지만 그 재수 없는 동생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자식을 받아주는 아버지가 섭섭해서 더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29,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동안 한 번도 명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아버지를 섬긴 자신에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벗들과 즐기게 해주지 않으셨으면서 창기들과 함께 그 많은 재산을 말아먹은 둘째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다니 이는 너무나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멍석말이라도 해서 실컷 두들겨 패고 종으로 부리든지 해야지 이렇게 성대한 잔치라니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맏아들의 원망하는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맏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31,3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맏아들에게도 재산을 상속하여 주어서 아버지의 것은 다 맏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아들은 송아지뿐 아니라 암소도 잡아먹어도 되었습니다. 자주 친구들을 불러 한 마리뿐 아니라 여러 마리를 잡아먹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이런 은혜를 누릴 줄 몰랐습니다. 그는 율법적이었고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 아들이었지만 실제 삶은 아버지 눈치를 보는 종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서 풍요롭게 살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 것인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집 나간 동생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난 집 안에 있는 탕자와 같았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큰아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구원받았을 때 그 은혜와 감격은 사라지고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많은 양을 치고 큰 역사를 이루었다는 의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나간 탕자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이 나와서 은혜받고 대접받는 것이 눈꼴시러워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의 양떼들을 맡아서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도 한때는 잃어버린 탕자였는데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집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큰아들처럼 율법적인 생각 종과 같은 마음으로 지내던 것을 회개하고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예전에 돌아온 탕자 말씀을 자주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온 탕자하면 바로 제가 생각날 정도로 자주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찾아온 목자님들을 피해 화장실에 숨거나 하숙집 담을 뛰어넘곤 하였습니다. 예과 시절 절친인 이인구 목자님하고 뺀질거리며 목자님 말 듣지 않고 죄를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저는 이인구 목자님 머리가 깨지기 전에 회개했지만 본3때 또 힘들어져 돌이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으로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인생소감 마지막 한마디 ‘도망자에서 추격자로’처럼 집나간 양들을 쫓아다니는 목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종각역으로 강남역으로 때로는 파주까지 양들을 심방다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양들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목자님 말처럼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가 저의 모토처럼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열 번 찾아가보고 그래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끝이다 생각하고 다시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받은 은혜도 모르고 힘든 소리하는 사람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나서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안 돌아오겠지 했던 사람이 다시 나타나서 환영받고 살진 송아지를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속이 시끄러웠습니다. 나처럼 성실하게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대접받아야지 항상 왜 죄인들만 대접받는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의로 가득찬 죄인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아버지 집에 거하는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가르쳐 주십니다. 또 제가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탕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바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한량없으신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기의로 가득 차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였던 것을 회개합니다. 제가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집 나간 영혼들 찾도록 찾아서 돌이키는 역사에 기쁨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집을 떠난 탕자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를 사랑하여 기다리고 돌아오면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며 아들로 대우하십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집 나간 영혼들을 찾도록 찾으며 돌아오면 기쁨으로 맞이하므로 우리 가운데 천국의 기쁨이 충만히 임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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