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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9-08 (일) 13:00
분 류 골로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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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골로새서 제3강] 위의 것을 찾으라

2013년 골로새서 제3강                                                        오정훈

위의 것을 찾으라

말씀/골로새서 3:1-17
요절/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지금까지의 말씀이 교리적인 내용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실천 편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알고 있는 지식에 못지않게 어떻게 행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은 보는 것만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위를 보면 위의 것을 추구하고 아래 것을 보면 아래 것만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위의 것에 있습니다. 신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무엇이며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인생의 목표와 신자다운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위의 것을 찾으라(1-6)
  1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대전제가 되는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면’ 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추구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위의 것을 찾으라고 명하십니다. 위의 것은 아래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 ‘영적인 것’, ‘장차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상급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보좌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는 삶은 땅의 보화를 팔아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시간과 물질과 젊음을 팔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라 (휘로네이테)는 것은 ‘마음에 두다’는 것으로 일을 이루기 위해 가슴에 품고 골똘히 고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 꼭 해보고 싶은 일을 가슴에 품고 어떻게 하든지 이루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 관심사, 마음에 두는 것이 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땅의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이 땅에서 끝나는 것들로 하나님 나라에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 사람들 보기에 좋은 것, 인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맛있는 음식, TV, 인터넷, 좋은 집,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핸드백, 근사한 학벌과 직업, 세상 명예와 권세 이런 것들입니다. 요즘은 외모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게 커져 중고등학생들 사이에 셀프 성형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몸매지상주의가 만들어낸 기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 직장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옷과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잠깐 있다가 다 지나가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요1서1:16,17은 말씀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땅의 것은 다 지나갑니다. 부도 명예도 권세도 지나가고 심지어 우리의 고난도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것은 결코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고 영광중에 주와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땅에 속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옛 사람은 죽고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영광중에 나타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하늘나라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이 얻은 생명, 덤으로 얻은 생명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음 받으면 덤으로 받은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생명을 완전히 얻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부단히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나타나리라’ 지금은 감추어져 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을 말씀합니다. 김연아 추신수 같은 유명운동 선수나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이 나타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중에 우리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소망입니다. 이를 안다면 이 땅의 것에 얽매인 삶을 돌이켜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의 것에 매여 근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구하기에 힘쓰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은 위의 것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아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끔 마음이 위를 향하기도 하지만 곧 아래로 내려와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그 중심에는 자동차와 여행이 있었는데 이런 저의 정서를 대변하는 단어는 ‘방랑자’였습니다. 70년대를 풍미했던 청아한 목소리로 들려나오던 ‘방랑자’란 노래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도 ‘땅의 방랑자’란 뜻을 가진 영국제 자동차를 흠모하여 길거리에서 이 자동차를 보면 손을 들어 경의를 표하곤 하였습니다. 또 박목월 선생님의 나그네란 시를 좋아하여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살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동경하는 자동차를 타고 멋진 풍광을 가진 곳에 나타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영광이요 참된 기쁨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동역자는 이런 저의 열망을 알고 빚만 갚으면 그 자동차를 사주겠다 희망을 주었지만 빚이 너무 많아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고 늘 지도책을 펴서 어디로 떠날 것인가 궁리하고 머릿속에 행로를 그리길 반복하였습니다. 여름 한철을 그런 꿈과 동경가운데 보내고 깨어보니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위의 것을 찾고자 하나 쉽지가 않고 온통 마음은 땅의 것에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한마디 말씀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결국 사라질 이 땅의 경치 속에 나타나는 것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영광입니다. 제가 이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고 이 땅에서 방랑자로 살고자 하는 땅을 향한 마음을 할례하고 위의 것을 찾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가을학기 이런 믿음과 소원 가운데 주와 복음 역사를 앞장서서 섬겨나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5a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땅에 있는 지체를 ‘누르라’, ‘억제하라’ 이렇게 해도 되는데 왜 구지 ‘죽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쓴 것입니까? 이는 땅에 있는 지체가 위의 것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살려두면 다시 적이 되어서 나를 공격하여 사로잡고 삼켜버립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를 보면 미군에게 사로잡혀 살아남기 위해 미국국가를 부르며 목숨을 구걸하는 독일군 포로가 나옵니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한 미군 병사의 호소에 의해 그 독일군 병사는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곧 자기 부대에 합류한 이 독일군 병사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미군병사의 가슴을 대검으로 찔러 죽입니다. 서로 원수이고 적인 상대에게 자비나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죽이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여야 하는 땅의 지체 곧 내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무엇입니까?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 말씀은 위의 것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서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풍요의 시대에 들어갈수록 음란의 세력은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어디다 눈을 둬야할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가 음란합니다. TV, 인터넷 한번 손을 잘못 누르면 음란의 세력이 내 안에 침투할 태세입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부를 축적하므로 돈이 넘쳐났는데 할 일이 없어지자 공중목욕탕 등을 만들어 성적타락에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육신주의에 먹혀 로마제국은 하루아침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군기가 엄정하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최근 잇달아 터진 성범죄 또한 우리사회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원수는 실제는 내 속에 있습니다. 단지 소돔 고모라보다 좀 덜 심할 뿐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 희곡에서 뉴올리언즈의 로얄이라는 거리를 당당하게 질주하는 두 대의 전차가 있는데 그 하나의 이름이 ‘욕망’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묘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욕망은 만족을 모르고 달려가는 전차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의 욕망을 채워줄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달려갑니다. 때로 인륜도 거스리고 하나님도 안중에 없습니다. 그 정점에 탐심이 있습니다. 탐심은 부나 이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서 사도 바울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6절입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앞에서 ‘욕망’이라는 전차와 ‘묘지’라는 전차가 있다고 했는데 욕망의 전차를 타고 달리면 결국 묘지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의 끝에 허무가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습니다. 우리는 지진이나 허리케인 쓰나미 등이 몰아쳐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초토화 시키는 것을 볼 때 마치 지옥의 묵시록이 전개되는 것처럼 느끼며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개인에 대해서, 가정이나 국가에 대해서 그렇게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대하고도 강력한 바로의 세력은 이겼지만 자신들 속에 있는 이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므로 먹고 마시고 뛰놀다가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같은 땅의 지체를 죽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는 전쟁입니다.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꼭 다 죽여야 하나 어느 정도 안고 가면 안 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으면 결국 이 지체가 그 사람을 죽여서 멸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땅의 일에 파묻혀서 믿음도 잃고 영적 가치관도 잃고 분별력도 잃어서 위의 것을 추구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났으니 다 됐다 생각하지 말고 이 싸움을 하고자 하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내 안의 죄의 세력과 싸우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위의 것을 좇는 삶을 살게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제 2장, 하나님의 자녀답게 새 옷을 입으라(7-17)
  사도 바울은 신자의 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옷에 비유하셨습니다. 7,8절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신자들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의 비방과 부끄러운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며 살았습니다. 화가 나면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기분 나쁘면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합리화하였습니다. 아마 골로새 교회 안에도 무시 받았다 상처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하고 뒤에서 비방하고 부끄러운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허물을 벗듯 벗어던져버리는 것으로 그런 모습을 원래의 나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신자의 신분에 맞는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옷은 신분을 나타내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이 입는 옷, 보통 사람이 입는 옷, 노예가 입는 옷이 다 달랐습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는가에 따라 그 옷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멀쩡하던 사람, 교양 있던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하게 됩니다. 이는 예비군복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신자는 거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9a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거짓은 사회에 죄를 만연시켜 모든 것을 불신하게 만드는 죄악의 근원이며 위에 속한 모임을 땅에 속한 모임을 만드는 무서운 적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로서 에덴동산에서부터 거짓말을 하므로 모든 악이 시작되었습니다. 반면 거짓의 반대는 진실입니다. 믿는 자의 특징은 바로 이 진실입니다. 우리 모임의 특징도 또한 진실이어야 합니다. 소감을 쓸 때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덧입을 때 듣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용기를 내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을 속여 거짓되게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9b,10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신자는 새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새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 곧 근본중심과 가치관이 새로워진 자입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치관이 복음적인 가치관으로 바뀌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골로새 교회 내에 있던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입고 있는 옷이 바뀌어야 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신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입니다. 이는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과거 진노의 자식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늘나라의 황태자요 공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의 특징을 지어주는 옷을 여섯 가지 덕목으로 표현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를 다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자아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온유와 오래 참음은 남의 무례나 모욕, 박해에 대해서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대하며 조용하게 오래 기다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두고 보자, 다시 한번만 걸리면...’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셨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나를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에 힘입어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옷 입어야 합니다. 이 옷이야말로 천국산 명품 옷입니다. <루이비똥, 구찌, 프라다, 버버리 이런 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품옷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옷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벌거숭이로 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옷에 띠를 띠어야 온전한 복장을 갖추게 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구슬을 꿰는 실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사랑으로 겸손하며, 사랑으로 온유하고, 오래 참으며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랑 없이 도를 닦고 자아완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롬13:10) 이점에서 신앙생활은 굉장한 내적싸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은총을 받았지만 400년 이상 노예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광야 40년의 모진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새 옷이 익숙해지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말씀에 순종하고자 피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끝으로 15-17절에서 신자의 새 생활을 끝까지 지탱해주는 두 가지 요소를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예수님은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가운데서도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는 평강이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평강이 우리 심령을 주장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평강을 깨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 사이의 불화, 욕심과 불신, 어두운 생각이 들어오면 이 평강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욕심과 불신을 회개하고 자기중심적인 된 것을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통해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고 그것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6,17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우리 속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먼저 은혜를 받고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게 됩니다. 가을학기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 깊이 은혜 받고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역사가 충만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의 찬미가 흐르는 곳에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감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힘든 시대를 살면서 감사할 것이 없고 감사제목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제목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감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차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갈수록 감사가 메말라 가는 시대에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고 감사가 흘러 넘쳐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위의 것을 찾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는 잠시 있을 땅의 것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만 위의 것을 추구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 가운데 우리 마음을 위의 것에 고정하고 죄를 이기며 위의 것을 추구하는 거룩한 순례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죄의 옷을 벗고 의의 옷을 입으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진 아름답고 복된 자들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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