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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4-13 (월) 11:20
홈페이지 http://ksubf.com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1강_청년아_일어나라(2)_천수원.hwp (36KB) (Down:358)
ㆍ추천: 9  ㆍ조회: 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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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부활절수양회 1강<청년아 일어나라>-천수원
2009년 부활절 제 1강  (천 수 원)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1-17
요절: 누가복음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 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Happy Easter! 청년 천수원 목자입니다. 제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청년이다.. 라고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부활절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제 속에 있는 죽음의 요소를 몰아내고 청년의 스피릿을 회복했기 때문에 감히 청년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살리신 사건과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없습니다. 이번 부활절 수양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부활의 권능을 덧입고, 기백 넘치는 청년으로 회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PART 1. 이만한 믿음(1-10)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공생애 대부분의 사역이 행해진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면서 한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어가는 사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종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 취급받았습니다. 더군다나 백부장은 유대를 점령하여 통치하는 로마군의 장교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자기 집의 한 종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것은 사용하던 물건을 폐기처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여길 만큼 하잘 것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2절 말씀을 보면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7:2)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또 거칠고 강포했던 로마 군인들의 성향을 생각할 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 하시기를 청한지라”(3). 백부장의 청을 받은 유대인의 장로들이 나아와 그를 위해 간절히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 장교인 “백부장”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을 위해 주둔하고 있는 이방인 점령군인 로마군은 유대 민족을 압제하는... 한마디로 적대자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로마의 백부장을 위해 유대인 장로들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4) 하며 간절히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지배자인 백부장의 권력이 두려워 이런 간청을 하고 있습니까? 5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 민족이 그로부터 받은바 사랑의 빚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5). 지배자로서 로마의 장교인 백부장이 유대 민족을 짓밟은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증언합니다. 더군다나 저들의 종교를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 스타일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열악한 상황으로 볼 때 단순히 그냥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여 회당을 지어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가지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적 관계성을 깨어 버리는 대사건이었습니다. 그가 점령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당시 짐승의 가치보다 못하게 여기는 그 종의 질병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종의 치유를 구하다니... 아! 정녕 로마 군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런 어둠 속에, 이방인 중에 드러나는 백부장과 같은 선한 사람에 대한 증거는 또한 우리 사역의 텃밭, 이 시대 전 세계 캠퍼스 가운데 우리가 소망 두고, 씨 뿌릴 수 있는 힘을 더해주는 소중한 근거가 됩니다.

같은 민족, 더구나 종교지도자들조차 자기 이익밖에 챙기지 않던 시대에서 오히려 점령군인 이방인 백부장의 행위는 놀랍습니다. 백부장의 성품으로 볼 때 그 자신에게는 자신의 집에 있는 종의 병을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저 작은 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는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가상히 여겨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시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부장의 겸손한 마음과 유대인보다 더 큰 믿음을 발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6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해 극존칭의 표현인 “주여”하고 호칭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당시 황제에게 쓰던 호칭입니다. 이는 ‘주인이시여’하는 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관할 권한을 가진 최고의 사람에 대한 극상의 호칭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든 말씀만 하시면 순종하겠다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백부장은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표적과 이적과 기사에 집착했습니다. 눈에 보지 않으면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뭘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할 것까지 있습니까? 그냥 이곳에서 한 마디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라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백부장은 그러한 이유를 어떻게 증거 합니까? 8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7:8) 이는 지도자가 그저 지시하고 군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의 임무를 이해하고 자신의 직무와 연결시켜 완벽하고도 충성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함부로 오라 가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감당할 수 없어했습니다. 또 자신이 직접 예수님 앞에 나가서 말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을 보내서 말합니다. 교만했거나 자기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 이방인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알고 이를 존중하는 지극한 배려와 겸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작은 한 부분을 무시하지 않고 세밀하게 신경을 쓰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위대한 믿음과 선행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왜 그렇게 백부장을 위해서 간청했는지가 비로소 이해되게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며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만한 믿음은 이렇게 위대한 믿음(such great faith)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방인을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표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자신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던 당시 종교지도자와 유대인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마땅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큰 믿음을 가져야 했지만 예수님을 불신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표적만 구하는데, 오히려 이방인이 이렇게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그의 믿음은 신약의 아브라함이라 할 만큼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는 말씀의 능력을 단순히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가상히 여기신 예수님은 병든 종을 즉각 고쳐주셨습니다. 보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이미 종은 강건해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사랑하는 한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맨날 똑같은 말씀만 공부하는 게 싫어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나면 이제 주위 것들도 배워야지.’ 하고 말하며 자신은 보다 구체적인 것들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파워포인트 같은 것을 켜놓고, 옛 지도에 나오는 지명의 유래라든지 그 시대의 생활상, 성경이름의 의미나 사해사본에 관한 연구기록, 같은 뭔가 학술적이고, 또 뭔가 분석적인 것들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찌나 도전적이던지 저도 순간 혹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사실 메시지를 준비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여서 지도를 펴고 나인성이 어디쯤인지도 찾아보고, 이것저것 자료를 뒤적이며 뭔가 좀 새로운 것이 없나 한참을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말씀 그 자체이며 믿음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오직 “말씀만 하시면” 하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백부장의 고귀한 믿음 하나이며, 이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성장과 더불어 날마다 그 깊이를 달리하며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나의 생활 중에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며 죄인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말씀의 권능과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여지고, 백부장과 같은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PART 2. 청년아, 일어나라!(11-17)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수넴 근처의 나인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즐거움” 이란 뜻을 가진 이 성 앞에서 뜻밖에도 예수님은 슬픈 장례 행렬과 만나게 됩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2). 그 죽은 사람이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는 표현은 비할 데 없이 극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젊은이가 왜 죽었는지, 충동적으로 자살 하였는지 아니면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젊은 날 그의 죽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고 특히 그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놓았습니다. 예전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당하고, 그 동안 이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이제 이 아들마저 떠나버리니 그녀의 슬픔을 누구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부는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가난한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모든 소망이 무너진 사람입니다.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만듭니다. 특히 젊은 날의 죽음은 인생의 꿈도 아름다움도 모두 짓밟아 버리기에 더욱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세자나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생들은 모두 죽음의 행렬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단 말입니까?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과부를 보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속에 애끓는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이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애통하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안타까운 상황에 개입하시는 역사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에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임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들이 가지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이들이 메시아의 사람들이자 예수의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엄청난 신앙의 훈련이나 능력 이전에, 만물을 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회복된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마음을 순수하고 순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1:5)을 소중하게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그녀가 요청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눈물을 더 흘리고 통곡하며 애처롭게 예수님께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예수님의 내면적 품성이 나인성의 과부가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현장에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마음이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단지 말뿐인 위로를 하시지 않으시고 시신 옆으로 다가가셔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4) 시신이 있는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얽어매는 율례를 깨뜨려 버리시고 죽은 청년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산 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듯 싶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죽음 권세를 파하신 부활의 하나님.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차가운 청년의 몸에 피가 돌고,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그 어미를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부활의 능력이 증거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슬픔과 비극을 기쁨과 소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젊은 때에 생명을 잃고 잠들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파하심으로 인간 슬픔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 줄 알았던 청년은 물론이요. 그 어머니까지 더 큰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청년이 관에 누워있을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서 일어나라고 하심으로 일어나야 할 존재로서 청년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십니다. 청년은 어떤 존재입니까? 청년[靑年]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나이가 20대 정도인 남자를 이르나 때로 그 시기에 있는 여자를 포함해서 이르기도 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탱탱한 저도 당연히 청년이 아니고, 여기 모인 대부분의 목자님들도 이미 청년이기에는 지나버린 시간이 야속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모두를 청년으로 부르시고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군에 간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멋진 청년 한요셉 형제로부터 영원한 청춘 고영훈목자님, 그리고 우리 제임스목자님까지 모두를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지금 우리는 너무나 푸르고, 아름다운 청년의 때입니다. 스스로 나이를 셈하며 내 인생 끝났다고 포기하기에는 우리의 불타는 스피릿이 그 나태함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밤새워 메시지를 쓰기위해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며 기도할 수 있는 체력이 있고, 양을 위해 기도하며 눈물 흘릴 뜨거운 가슴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 자신이 모두가 청년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덧입은 젊은 일꾼이요 복음의 사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왕년을 논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체면을 차리고 앉아서 남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기에는 우리의 젊음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나이는 청년이 아니시지만 이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시는 이 정신만큼은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여러 가지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들자면 가능성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가능성은 있지만 분별력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경험과 분별력은 있지만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분별력과 가능성이 동시에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은 청년의 특권입니다. 청년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생각할 여유도 있고 선택할 권리도 있습니다. 청년의 가능성은 어떤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무한히 발휘될 수도 있고 시들고 말라버릴 수도 있습니다. 청년의 때에 진리에 기초한 인생관을 쌓고 진리의 말씀에 인생의 뿌리를 내린다면 큰 영향력을 미치는 미래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금 나를 청년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듭 묵상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안고 있는 병이 가시가 되어 늘 부정적인 생각과 비관, 절망 가운데 살았던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새 힘을 얻었다고 늘 고백하지만 사는 중에 찾아오는 어두운 생각과 사단의 고소는 지금도 마치 올무와 같이 저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몸이 심하게 아파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날이 많고, 잠이 들더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 척추가 부러져서 고통 하는 처참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악몽을 꾸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죽은 청년과 같이 관은 아닐지라도 실제로 누워서 방바닥을 기어 다니던 자였습니다. 매일 진통제를 먹어가며 자신의 몸 하나 일으킬 힘이 없었고, 무엇하나 건질 것 없이 정신은 피폐하여 악한 생각과 절망의 세력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빚으시고, 역사를 감당하는 기쁨에 감격하여 날마다 청년의 기백이 넘쳐야할 제가 어찌하여 청년 되기를 힘겨워하고 있는 가를 생각할 때 말씀이 있음에도 그 음성을 듣지 않고, 귀를 닫고 죽어버린 저의 영을 발견하고 깊이 회개케 되었습니다.
지난 것에 얽매이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세상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과 가식, 좀 더 나은 것들로 나를 채우고픈 욕망이 저를 옭아매고 있는 것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저는 2007년부터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으로 스스로 순종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신을 깨닫고, ‘그래! 내가 할 수 없다면  주의 종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자’ 하고 스스로 결단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특별한 열매들을 제게 허락하셨습니다. 수양회 연극과 말씀을 섬기고, 올 초부터 타이틀 까지 감당하면서 작은 일로 충성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즐거움을 허락하셨고, 순종을 통해 누리는 겸손과 감사의 기쁨을 충만히 채워주셨습니다. 지금의 저는 치대를 비롯한 모임 모든 동역자들의 일방적인 기도와 섬김으로 억지로 일어선 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게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스스로 일어서서 새 생명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부활의 권능을 덧입은 청년의 기백으로 주님 주신 사명을 즐겁게 감당하며 살 것을 결단합니다.
저는 육신의 고통과 세상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통해 물질의 덧없음과 인생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이 정말 내게 왜 이러시나 하는 원망이 제 영혼을 지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훈련과 제 몸의 가시를 통해 오직 하나님 한분 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 더 큰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죄인에게 날마다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을 것을 주고, 양을 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직접 나아가 이 시대 관속에 누운 젊은이들을 깨우고 생명의 말씀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고 예수님께서 청년아 하고 부르실 때 이미 일어나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청년으로 보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청년의 열정으로 거듭나는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죽어가는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의 삶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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