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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7-11 (월) 17:13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18강-1.hwp (107KB) (Down: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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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8강]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2022년 누가복음 제 18강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 / 누가복음 10:25-42
요절 /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잘 알고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25-37)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의 질문은 “마지막 부활 때에 내가 구원 받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로  질문하였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구원을 통해 누리는 영적인 생명으로서 그 안에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서기관으로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전문가입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고 지키기 위해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가 영생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에 기쁨이 없고 답답했습니다. 율법을 많이 아는 만큼 죄의식에 더욱 시달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원하지만 이 율법교사와 같이 행위로 영생을 얻고자 하다가 실패하고 절망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11,12절은 말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3:10)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 기초해서 자신이 제시한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그는 신명기 6장5절과 레위기 19장18절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율법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고 율법의 정신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의 핵심이 되는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율법을 잘 지켜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영생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렇게 행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내면에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지만 ‘네 대답이 옳도다’ 하심으로 율법교사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를 행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17)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행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율법교사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속으로 이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질문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웃은 율법대로 살아가는 유대인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들은 상종 못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이라 생각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계명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이웃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말씀을 배우고 주일에 메시지를 듣고 소감도 씁니다. 또 말씀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정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행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잘 지내면서 자기를 잘보이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 가르쳐주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약 27km 정도이고 예루살렘은 해발 690m, 여리고는 해수면 아래로 390m로 고도가 1080m 차이가 납니다. 그 길은 구불구불하고 비탈진 내리막 길이었고 주변에는 바위들이 널려 있어 여행객들 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강도들이 이곳의 동굴에 은신하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약탈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그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죽도록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쓰러졌습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 제사장은 정해진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하여 세움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 성전에서 봉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종교지도자로서 어려운 이웃을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침 그때 제사장이 지나갔다는 것은 강도 만난 자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얼마 후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도와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정해진 형식에 따라 예배 의식에 필요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경건하고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피해간 것입니까? 도와주려다가 주변에 숨어 있는 강도들에게 똑같이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도와주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댓가가 적지 않습니다. 괜히 도와주었다가 목격자 진술을 위해 경찰서와 법원에 불려 다니며 귀찮은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해자로 오해를 받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수고가 필요하고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또 레위기 21:1절에서는 제사장들은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면 칠일 동안 부정하게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예배도 드릴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하게 되지 않고자 고의적으로 피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이웃사랑의 계명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몰랐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 지식과 예배 형식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수 혈통을 지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족이 되어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며 경멸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을 증오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처럼 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모른 척 하고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응급처치를 하고 자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주었습니다. 그 후 그를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간호하며 돌봐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자신의 용무를 보기 위해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돌봐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데나리온 둘은 며칠간 숙박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처음 보는 유대인을 위해 사마리아인이 자기 돈으로 비용을 지불하면서 돌봐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 사람은 충분히 칭찬받을만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행 일정에 차질을 빚으면서까지 희생적으로 끝까지 책임성 있게 그 사람을 돌봐주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에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무시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도와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았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모든 장벽을 극복하게 했고 그를 살리기 위해 온갖 수고와 희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율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도와주는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곧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거나 조금 희생하고 손해의식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병을 고쳐주시고 말씀으로 먹여 주셨습니다.(마14:14, 막6;34) 맹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마20:34), 한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막1:41) 반면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처럼 종교생활에는 열심이 있지만 인간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아도 무관심합니다. 이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 질문하셨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마음에 자비와 긍휼이 없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웃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죄악된 세상에서 사탄의 종되어 하나님과 원수된 삶을 살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죽어가던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살이 찢기시고 포도주와 같이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시고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온전한 희생으로 섬겨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으사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지설교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덧입은 자로서 우리 이웃의 죽어가는 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을 객체에서 주체로 바꿔주셨습니다.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질문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중에서 누가 이웃 사랑의 율법을 잘 지켰는가 물으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37a) 그는 민족적인 자존심 때문에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못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란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37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교사의 문제는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껴둔 포도주와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자신의 겉옷자락을 찢고 자신의 짐승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갑을 열어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정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주저 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오늘날 강도 만난 자는 누구입니까? 캠퍼스에는 사탄의 공격을 받아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는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도와주지 못하는 데에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먼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일단 말씀의 포도주로 응급처치를 한 후 예수님이 계신 교회 주막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여기에는 희생과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데리고 오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치료하시고 살려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함현진 사모님은 세 아들을 감당하느라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도 양들을 살리기 위해 밤낮 없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런 헌신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자매들을 살리는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양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말씀공부를 많이 하고 가르치기도 많이 하고 메시지도 많이 전했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용할 양식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성경다독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려 하니 내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이웃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돌아볼 때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캠퍼스 목자요 추수할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자로서 양들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더운 여름 날 퇴근후 캠퍼스에 가는 것은 귀찮고 자기부인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해야할 일들이 날마다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기 할 일을 철저히 하면서 율법교사와 같이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저에게는 죄의 종되어 고통하며 죽어가는 캠퍼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심히 부족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데에는 시기가 중요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3년 만에 여름수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코로나로 지치고 갈급한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적기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에 피싱과 기도의 불이 점점 타오르고 있습니다. 학생들도 시험을 마치고 기도모임을 이루고 이 역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 하나님을 몰라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에게 다가오셔서 말씀의 포도주와 성령의 기름으로 치유하시고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신 선배목자님들과,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캠퍼스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38-42)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길을 가다가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서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발을 씻을 수 있게 물과 수건을 갖다 드렸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풍성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모든 일을 하기에는 벅찼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좀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마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결국 마르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40b)
  불평하는 마르다를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 식사준비를 열심히 하는 마르다의 섬김을 예수님은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교제가 없이 자기 열심과 성실로 하다가 지쳐 불평이 생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말씀으로 교제 나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고 복된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는 모범적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한 삶으로 인해 말씀을 듣는 것을 소홀히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새벽에 습관을 좇아 산에 가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을 가르치기에 힘쓰셨습니다. 사도행진 6장2,4절은 말합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모든 분주한 일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일에 집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여름수양회가 다가오면서 점점 많은 일로 바빠지고 분주해지기 쉽습니다. 바쁠수록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예수님과 교제하기에 힘쓰며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한 기쁨이 차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사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소망 없이 죽어가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찾아오셔서 예수님의 붉은 피로 내 죄를 씻어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고 모든 상처를 싸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부르심의 은혜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부르심의 은혜를 혼자 즐기지 않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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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3강]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관리자 2022-10-30 104
778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2강]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관리자 2022-10-23 132
777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1강]영생을 얻는 길 관리자 2022-10-16 138
776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0강]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관리자 2022-10-09 170
775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9강]엎드리어 감사하니 관리자 2022-10-02 181
774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8강]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관리자 2022-09-25 195
773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7강]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관리자 2022-09-18 179
772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6강]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관리자 2022-09-11 215
771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5강]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관리자 2022-09-04 167
770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4강]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관리자 2022-08-28 215
769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3강]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관리자 2022-08-22 206
768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22강]염려하지 말라 관리자 2022-08-14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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