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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31 (일) 10:47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24년_마가복음_제4강-1.hwp (139KB)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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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4강]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24년 마가복음 제4강                                                                  이 종 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18-3:6
요절/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전 시대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였다면 이제는 복음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낡은 전통은 새로운 복음에 저항하며 충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더 놀라운 역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영접하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게 되고 세리와 각종 죄인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며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는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니다. 과연 나는 새 포도주된 복음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영접하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마음이 새 가죽 부대로 준비되기를 기도합니다.

제 1 장,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지난 말씀에서 세리 레위는 큰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과 제자들뿐 아니라 동료 죄인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 따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금식을 하였습니다(눅 18:12). 금식은 유대교의 중요한 전통 중 하나였으며, 영적 성장과 청결을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정기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금식하는 날이라는 걸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레위에게 오늘은 금식하는 날이니까 가볍게 미팅만 하고 다른 날 잔치를 하자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을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레위의 기쁨과 감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여러 죄인들과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떤 관습과 형식보다 구원받은 한 영혼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레위도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날은 조용히 넘어갈 법도 한데, 얼마나 기쁨이 컸는지 금식하는 날에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눅 5:29).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금식을 하지 않느냐?’ 하며 예수님 일행을 금식을 어기는 불경건한 자들로 판단하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인격과 언행의 절제와 자기 수행을 위한 특별한 행동이 요구되었습니다. 금식은 이와 같은 요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의무를 대놓고 무시한 것으로 여기고 강력하게 항의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어찌하여’라는 질문이 계속되면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2:7,16,18,24).
19,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새로운 금식의 기준을 가르쳐주십니다. 당시 혼인 잔치가 있을 경우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곳에서도 혼인 잔치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특히 유대인 결혼문화는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하객들이 즐기는 축제였습니다. 근엄한 유대인들도 이때만큼은 밤새 취하도록 마시고 노래 부르며 오락을 즐겼습니다. 이런 날 만일 잔치집에서 금식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잔치의 흥을 깨는 것이고 신랑에 대한 모욕이며 무례한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신앙생활이 혼인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하셨습니다(마 22: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합니다(요 3:29). 유대인들이 금식하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천국 잔치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부들과 세리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죄가 해결되었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이 생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혼인 잔치에서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인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금식을 완전히 없애신 것은 아닙니다. 금식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날은 ‘신랑을 빼앗기는 날’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 날’은 꼭 예수님이 잡혀 죽으시는 어느 한 시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빼앗기는 ‘그 날’, 죄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하고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린 ‘그 날’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결국 ‘신랑’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진정한 금식의 기준입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을 빼앗겨도 예수님을 가졌다면 혼인 잔치에 있는 것처럼 기쁜 것이고, 다 가졌어도 예수님을 잃어버린다면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사람을 옥죄는 전통과, 기쁨을 주는 복음이 양립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21,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은 천을 짠 후 잿물에 삶아 희고 부드럽게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베를 말합니다. 즉 세탁 후 줄어드는 것을 막는 처리를 하지 않은 천입니다. 요즘에는 빨아도 줄어들지 않는 옷감이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여성들의 큰 노동이었던 ‘다듬이질’은 옷을 세탁한 후 줄어들어 생긴 주름을 펴고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옷감이 오래되면 더 이상 물에 빨아도 수축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낡은 옷’입니다. 그러므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는 있지만, 세탁을 하면 ‘새 것’이 ‘낡은 것’을 당겨서 봉합한 부위가 터지고 결국은 더 심하게 해어집니다. 새 가죽 부대와 낡은 가죽 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포도주를 보통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았는데, 새 포도주의 경우, 당분과 효모가 작용하여 발효하면서 생긴 탄산가스 때문에 부대가 팽팽하게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신축성이 없는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가죽이 가스 팽창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기 쉬웠습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은 당시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것’,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 것’,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1:27).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권위 없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 또는 기존의 종교 전통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끌어당겨 자기들의 전통에 붙이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의 복음을 자신들의 조직 틀 속에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현재 예수님을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이 낡은 부대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관습을 잘 지키는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방식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고 정죄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새 부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준비된 마음입니다. 언제라도 고치고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죄 가운데 고통받는 삶에 대해 깊은 고찰이 있는 마음입니다. 소외되고 무시받는 인생에 대해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역동성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생베 조각의 비유에 나오는 ‘당기어’에 해당하는 ‘αἴρω’(아이로)는, 앞 절에서의 신랑을 ‘빼앗기다’는 단어와 비슷합니다. ‘해어짐’에 해당하는 ‘σχίσμα’(스키스마)는, 문자적으로 ‘찢어짐’(tear)입니다. 또 가죽 부대에 나오는 ‘버리게 된다’는 말은, ‘망한다’(ἀπόλλυμι, 아폴뤼미)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바리새인들이 고집하는 낡고 경직된 방식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힘이 있고 유연성이 있어서 낡고 딱딱한 장로유전을 당기고 터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심각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환난이나 박해를 동반합니다(4:17). 그러나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신이 찢어져서라도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당시 박해를 당하고 있던 로마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네로황제 때의 극심한 박해가 있던 때입니다. 로마당국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 사악한 미신으로 로마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그 사회에서 겪는 박해는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을 축출하려던 유대교가 터져버린 것처럼, 예수님의 나라는 로마를 터뜨릴 것이고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 마가는 현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조금도 위축되지 말고 계속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잘 담는 부대가 되도록 격려합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붙들고 기쁨으로 이겨내도록 돕고 있습니다.
철근과 콘크리트는 온도, 습도에 따라 정확하게 같은 비율로 수축 팽창한다고 합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말하면, 열팽창계수가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관계없이 완벽한 공존을 이루고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철근콘크리트로 마천루를 지을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새 부대가 되어서 새 포도주,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우리가 잘 밀착되어 영적 마천루를 지을 수 있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 과거의 낡은 가죽 부대를 확실히 정리하는 것입니다. 고질적인 죄 문제, 과거의 자랑거리,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집요한 애착 등을 하나님께 들고 나가 엎드려 회개하고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정체상태에 있던 나를 회복시키시고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부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유연한 마음입니다. 내 생각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스텝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리드에 잘 따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위축되지 않고 기쁨과 소망이 가득한 삶을 살 것입니다.
셋째,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덧입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만의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들어오면 자신들이 있는 곳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행 1:8). 이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상한 마음 때문이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경력이 쌓일수록 바리새인들처럼 낡은 가죽 부대가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시대 우리가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하여 예수님의 삶을 배워 성장하고 팽창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새 부대가 되어서 캠퍼스양들을 말씀으로 먹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2 장,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23, 24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며 따졌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삭을 잘라서 먹었고(마 12:1),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눅 6:1)고 나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벼 껍질을 날려 보내고 먹은 행위는,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타작, 곡식을 까부는 일에 해당하였습니다. 모세율법, 즉 토라를 해설하는 미쉬나에 따르면, 제자들이 한 행위는 안식일에 해서 안되는 39가지 목록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당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마 늘 배가 고팠던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손이 갔을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예수님 일행은 또 곤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고를 쳤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늘 제자들 편이셨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행 13:22).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경외하였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적절하게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나 그의 부하들, 그리고 진설병을 준 아비아달 대제사장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레 24:9, 삼상 21:6).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너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이 예를 드신 예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먹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반복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제자들은 늘 먹는 문제에 민감하였습니다. 레위 집에서 벌어진 잔치 때처럼 배부르게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수행을 위해 금식을 하였지만, 제자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금식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있었으므로 기꺼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는 사람들을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털끝만큼도 굶주린 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이날을 복 주시며 거룩하게 하신 것이 기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왜 안식이 필요하셨을까요? 그가 창조하신 사람에게 쉼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일과 노예됨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백성으로 특권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노동에 대한 부담과 압박으로 지칠 수 있는 사람들(남종, 여종)이나 동물들(소, 나귀, 다른 가축)까지 안식일에 쉬게 하셨습니다(신 5:12-14). 이사야 말씀에서는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사 58:14).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즉 사람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법이 사람을 옥죄고 정죄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목적을 되돌려 놓으십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이 ‘새 것’, ‘새 포도주’로 비유하신 복음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변질되고 프레임으로 고정된 율법을, 사람들에게 참 안식과 기쁨과 자유를 주는 본래 의미로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에도’(even)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인’은 ‘κύριός’(퀴리오스)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질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권위자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법만 지킨다고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 안에서 참 쉼과 기쁨과 자유를 찾고 누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안식을 주시는가 보여주십니다. 3장 1,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안식일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고,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쉽습니다. 하물며 낡은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던 유대사회에서 이 한 손 마른 사람은 말라버린 손으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약자를 미끼로 예수님을 잡고자 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눅 6:8). 그러나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당의 한복판에, 종교지도자들과의 안식일 논쟁의 한복판에 세우십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순종하여 섰습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회당 한가운데 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게 되면 예수님의 편에 서는 것이 되고 예수님처럼 종교지도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능한 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무엇이 옳은가’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십니다. 반면에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옳은 선택을 거부하는 침묵입니다. 이 침묵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으며,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침묵입니다. 지금껏 관습을 좇아 행했을 뿐, 진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마른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그가 손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제일 보여주기 싫은 것이 그 마른 손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사람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의 손을 회복시키십니다. 이는 그동안 고통받아왔던 그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는 역사였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주님께로부터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는가 보여줍니다. 인간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새 부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더 악해져서 회당을 나가자마자 평소 정적이던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합니다. 그들은 내면이 낡은 옷처럼 신축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매우 똑똑하고 지성적으로 보이나 심각한 영적 장애인들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키신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안식을 주시고자 위험을 무릅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 한 손 마른 자 같은 우리의 안식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 전통, 안식일 율법을 좇아 살며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식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빼앗길 때 하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요 진정한 경건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같이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이 빠진 구복신앙으로 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라 하십니다. 반면에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봄의 새싹처럼 싱그럽고 생동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굳어진 틀에서 벗어나 새 포도주를 담는 신선하고 역동적인 새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요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공의가 없는 상태에서 진료와 치료를 같이 하다 보니 거의 점심을 굶었습니다. 손끝 피부가 망가져서 얼마 전 주민센터에 가서 서류를 발급받으려는데 지문이 잘 찍히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신문기사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심하여 늘 습관적으로 하던 인터넷 서칭도 줄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봄학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자 할 때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새 부대가 되도록 하십니다. 묵상할 때 저도 어느덧 바리새인과 같이 딱딱한 관습과 형식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된 내면에 온갖 세상 것을 담아 불평이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런 저를 아끼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영적으로 회복케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 부대가 될 수 있는지 구할 때, 먼저 자족하는 마음, 고질적인 교만을 청산하도록 하십니다.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무엇보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것처럼 전도에 매진하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새 부대로 회복된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유연한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 주님의 가르침을 담으므로 먼저는 참 쉼을 통해 영적으로 온전해지고,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캠퍼스 양들에게 전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기쁨을 주며 안식을 줍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항상 혼인 잔치 같은 기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는 새 가죽 부대가 되어 항상 이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죄로 인하여 한 손 마른 자 같은 캠퍼스 양들이 회복되어 쉼을 누리도록 돕는, 목자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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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7강]그가 누구이기에 관리자 2024-04-28 127
861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6강]하나님 나라의 비밀 관리자 2024-04-21 151
860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5강]열둘을 세우셨으니 관리자 2024-04-14 177
859 마가복음 [2024년 부활절 메시지]그가 살아나셨다 관리자 2024-04-07 163
858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4강]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관리자 2024-03-31 188
857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3강]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관리자 2024-03-24 209
856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2강]권위 있는 새 교훈 관리자 2024-03-17 215
855 마가복음 [2024년 마가복음 제1강]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관리자 2024-03-10 308
854 디도서 [2024년 디도서 제2강]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 관리자 2024-03-03 196
853 디도서 [2024년 디도서 제1강]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책망하게 하라 관리자 2024-02-25 220
852 야고보서 [2024년 새해맞이 준비 특강 야고보서 5강]주의 강림이 가까우니.. 관리자 2024-02-18 272
851 야고보서 [2024년 새해맞이 준비 특강 야고보서 4강]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관리자 2024-02-11 234
850 야고보서 [2024년 새해맞이 준비 특강 야고보서 3강]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관리자 2024-02-04 230
849 야고보서 [2024년 새해맞이 준비 특강 야고보서 2강]참된 믿음 관리자 2024-01-28 219
848 야고보서 [2024년 야고보서 제1강]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관리자 2024-01-21 265
847 디모데후서 [2024년 신년 말씀 3강]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관리자 2024-01-14 207
846 마가복음 [2024년 신년 말씀 2강]하나님을 믿으라 관리자 2024-01-07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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