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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21 (일) 13:01
분 류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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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14강]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2015년 요한복음 제14강                                                                  이인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1:1-44
요절: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게 믿느냐”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마지막 7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외한 최고의 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메르스가 주는 사망권세로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1장,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16)
  1절을 보십시오. 어떤 병자가 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후에 이곳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으며 감사와 경외심을 표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일찍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부지런한 여인으로 열심히 일하며 주님역사를 섬겼고 마리아는 조용히 사색하며 예수님 말씀 듣기를 좋아했던 자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주 그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나누기도 하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 10;38-42) 부모가 없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부모처럼 사랑하고 의지하며 꿋꿋하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힘든 장사 일을 끝내고 해질 무렵 산을 넘어 올 땐 두 자매들은 동구 밖까지 나중 나와 지친 그를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손엔 마르다를 위한 음식거리와 마리아를 위한 향유 몇 방울을 담은 작은 병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안의 기둥이었던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돈이 없어 병든 낙타를 끌고 며칠 동안 힘들게 장사하고 돌아온 후 나사로는 고열이 나더니 심한 기침을 했습니다. 가벼운 감기인줄 알았는데 갈수록 심해져 이젠 숨쉬기조차 힘들어했습니다. 발병초기에 빨리 대처하지 못했을 때 병이 심해져 이젠 대형 병원보다 더 용하다는 사랑내과의원이나 믿음 한의원에 가도 안됐습니다. 나사로의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자매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빨리 와달라고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은 그들은 병든 사실만 알리면 예수님께서 가장 빨리, 가장 좋은 치료를 해줄 것을 믿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늘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되고 만사형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 수 있고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취직과 결혼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만성적인 자녀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습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비추는 것처럼 고난도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원래 고통의 바다이니 타고난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모든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볼 때 나사로의 병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상황은 어둡고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좋은 기회였습니다. 시편 46편은 유다왕 히스기야 때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난국을 극복한 배경가운데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진짜 신자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피난처시오 힘이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심을 믿는 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일어나는 환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지만 환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인생의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고난을 통해 인내를 얻을 수 있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5;3,4) 진주조개는 10년 이상을 이물질로 속살이 상하는 고통을 인내로 이겨낸 후에야 한 알의 빛나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정금과 같이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시고 인도해가십니다.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쓰시기 위해 연단하시는구나 감사하고 고난을 이길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위기를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달려가 고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것 같이 말씀으로 당장에 고쳐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왠지 심오한 뜻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고 나중에는 시신이 썩어 냄새까지 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이틀을 머물고 하루 동안 나사로의 사는 베다니에 갔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된 때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었을 때였습니다. 유대풍습에는 죽은지 3일이 지나야 완전한 죽음으로 봤습니다. 왜냐면 죽은 줄 알았는데 기절했다 깨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일말의 불신도 없애기 위해 완전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나흘 후에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정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부활신앙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은 그 사람의 믿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기도하면 바로 이뤄주시는 문제해결 방식으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선 믿음이 성장하는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의 단계를 넘어 영적인 사랑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가장 좋은 믿음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항상 완전하고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때는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 두 번의 꿈을 꾼 후 지도자로써의 소원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총리감인 요셉이라도 인생 연단 없이 아직 어릴 때 총리를 시켜준다면 본인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모세는 40년 왕궁교육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열정과 소원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40년간의 광야훈련 없이 지도자가 됐다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노예백성들을 인내하지 못하고 전멸시켰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금방 기도를 응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루 이틀뿐 아니라 때로는 1-2년 심지어 10-20년을 지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을 만한 믿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라던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지만 하나님께선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신자들에게 큰 고난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결국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제자들의 내면에는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깊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켜 소심하고 비겁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9절)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외적환경이 아닌 내면에 빛 되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하신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어떤 세상의 어둠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든 세상역사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주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생명이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를 전도여행 할 때 수많은 죽음의 위협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9절 말씀에서 ‘낮’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낮 시간은 12시간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면서도 또한 어떤 이에겐 심히 부족한 시간입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지만 시한부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일분 일초가 생명 같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늦은 시간은 없지만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일생을 끝내고 죽음 앞에서 껄껄껄한다고 합니다. “좀 더 사랑하며 살껄. 좀 더 베풀며 살껄, 좀 더 용서하며 살껄.”
  예수님은 이제 “우리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하자.”(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잠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는 없습니다. 왜냐면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푹 쉬고 깨어나 새로운 아침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또 깨어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봅니다. 끝장났다고 보고 실패로 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고 평생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죽음을 잠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죽음에서 깨워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죽음을 다시 깨어나는 잠으로 봄으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매일 잠을 통해, 인생의 1/3을 자면서 죽음을 연습합니다. 매일 중요한 것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할 때 밤에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낮 시간에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영광을 위해 삶으로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활신앙이 없는 제자들은 죽은 나사로에게 가자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도마가 비장한 각오로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의심의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가만히 있는데 의심 많은 도마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바람에 다른 제자들은 깜짝 놀라 사색이 되었습니다. 결국 도마의 대안론에 밀려 예수님의 대세론을 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마의 의리신앙은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충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기쁨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믿음은 한계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부활신앙이 필요했습니다.

제 2장, 부활이요 생명이니(17-44)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신은 벌서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절망의 때가 예수님께는 희망의 때요, 역사를 시작할 때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가 맞았습니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마리아의 첫 마디도 마찬가지였습니다.(32) 그들은 죽으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는 한계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한계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고 의지했던 오빠의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 큰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살아있는 자의 삶의 의욕과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죽음은 죽은 자뿐 아니라 살아있는 자까지도 지배합니다. 살아있는 자를 지배해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다 결국 죽게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한 것이 미안했던지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하며 부활을 장래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하며 과거에 얽매였습니다. 또 이제는 ‘마지막 날 부활’ 이라고 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과거와 미래는 있었으나 현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현재 여전히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나 실패의 기억에 빠져 현재를 살아갑니다. 과거는 지나갔지만 현재를 억매이면서 다가올 미래까지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그때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그때 초기대처만 잘했다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키기 위해 타임머신을 상상하고 심지어 예전 흥행했던 슈퍼맨이라는 영화에서는 죽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슈퍼맨이 지구를 거꾸로 돌려 과거로 돌아가 악당들을 물리치면서 연인이 죽지 않도록 한다는 영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과거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도 다시 위기에 빠져야 하는 모순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상일 뿐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과거의 죄악과 실패와 상처까지도 합력하여 미래에 선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선 죽음이 주는 과거의 상처에 매어있는 마르다에게 현재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란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착하게 살면 나중 죽은 후 천국에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나중 죽은 후가 아닌 현재 부활의 권능자 되신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요 생명’은 죽음을 이긴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게 하는 원인인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죽는다 해도 부활하게 됩니다. 또 현재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살아있을 때도 죽음권세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은 잠시 쉬어가는 잠일 뿐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자는 나중 죽은 후 뿐 아니라 현재 살아 있을 때도 죽음에서 해방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의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마르다는 성경적인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믿음은 다릅니다. 머리로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선 마르다에게 “그래 이렇게 말하니까 좀 위안이 되느냐? 좀 알겠느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심으로 부활신앙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마르다 만큼 성경공부를 많이 한 우리는 부활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하고 옆구리를 찌르면 고린도전서 15장이 입에서 술술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막상 현실에서는 죽음권세가 주는 과거의 상처와 실패에 매이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 상황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태아와 어머니가 탯줄로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와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생명의 관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믿음으로 고백하도록 하심으로 부활의 믿음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믿음으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스펄젼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금괴를 현재 통화되는 주화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통해 부활신앙이라는 금덩어리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현재 쓰이는 돈(주화)으로 바꿀 수 없다면 땅에 묻어둔 채 구걸하는 거지처럼 살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사관이 바뀌고 소망이 바뀝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 되어있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또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생명이 주는 희망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나를 절망케 했던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현재 나를 더 깨어있고 하고 노력하게 해서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또 부활신앙이 있으면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함으로 지금 사는 인생을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역사를 섬기며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을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보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35)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 연민에 젖어 우는 눈물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경우는 3번 있습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우셨고 또 한 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우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여 우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데서 오는 사랑과 긍휼의 눈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인생을 꽃피우기도전에 바다 속에 생매장된 세월 호 사건 이후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잠시 눈물을 보여줬을 뿐, 누구도 죽은 자나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지배아래 있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시고 인생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은 결국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믿음으로 고백을 했지만 온전한 부활의 믿음을 체험하기 위해선 돌을 옮기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실 마르다가 돌을 옮기는 것과 관계없이 나사로를 살리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마르다가 돌을 옮기는 순종을 통해 부활의 믿음을 체험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지만 또한 순종을 통해 믿음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마음속에 있는 불신의 돌, 의심의 돌을 믿음으로 옮겨놓아야 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예수님의 음성은 태초에 말씀으로 생명을 지으신 권능으로 죽은 나사로의 썩어가는 육신에 들어가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들어가자 나사로는 수족이 붕대로 묶인 채 그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놓음으로 나사로는 누이들의 품에 안길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자신의 부활의 예표가 됩니다. 나사로는 부활했으나 또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영원히 죽지 않으시고 지금도 모든 믿는 자에게 죽음을 이긴 생명인 영생을 주십니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온 나라가 메르스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사망권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슬픔은 세월이 가면 잊혀지겠지만 메르스로 인한 두려움은 갈수록 커져가며 온 나라를 집어 삼키려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가진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직 이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이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영광을 위함임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우리가 먼저 말씀과 기도 가운데 부활신앙을 덧입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부활신앙으로 어두운 세상가운데 하나님영광을 위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메르스 여파로 제 근무지에도 환자수가 급감하고 내원하는 환자도 예민해졌습니다. 얼마 전엔 작년부터 문제를 일으켰던 진상환자가 또 찾아와 마음을 졸이게 했습니다. 오랫동안 억매였던 직원문제가 마무리되자마자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현실문제가운데 문제만을 바라보면 정말 문제에 빠지게 됨을 깨닫습니다. 4월 부활시즌도 지났는데 부활메시지를 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진정 지금이야말로 부활신앙이 필요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말씀을 붙들면서 문제속에서도 사망권세에 시달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생명력으로 문제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해결할 믿음과 지혜를 덧입게 됩니다. 인생 고난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만 제가 고난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덧입고 사망권세로 어두운 시대 하나님영광을 위해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은 현재 이 시간에도 우리가운데 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력이 나의 생명력이 되고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영광을 드러내는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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