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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31 (일) 13:54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15_요한복음_제11강-1(오정훈).hwp (64KB) (Down: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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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11강]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2015년 요한복음 제11강                                                                         오정훈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말씀; 요한복음 8:1-20
요절;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흔히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이런 말을 합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다 잊을만 하면 공공연히 말하는 자들을 보면 솔직히 용서가 안됩니다. 요즘은 또 운전 중 시비로 인해 보복운전 위협운전이 많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소한 서로간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서 생기는 위험이요 비극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감정대로 행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더 큰 보복과 악순환만 가져올 뿐입니다. 세상의 만연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정죄치 않는 용서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배움으로 용서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길 기도합니다.

초막절 축제가 다 끝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가 이른 새벽에 성전으로 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명절도 끝나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왜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을 부지런히 가르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초막절 축제로 인해 한껏 들떴지만 또 한편으로 목말랐을 것입니다. 이는 종교행사만으로는 갈함을 채워주지 못하고 생명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 갈증을 아시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보실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인생에게 필요한 도에 대해서 가르칠 것이 많으셨습니다. 계속하여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답게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가르치실 때 정작 성경선생이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죄를 짓는 무리들이 있음을 알고 눈에 불을 켜고 잠복하다가 마침내 한 여인을 잡아냈습니다. 이 여인은 눈에 가시 같던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는 좋은 미끼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목자요 그들을 돌보아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죄에 빠진 여인을 악용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음행의 죄만큼 무서운 죄, 어찌 보면 음행죄보다 더 큰, 율법을 가장한 사악함의 죄가 그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모세가 간음죄에 대해 가르쳐 준 계명의 근본정신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이라 한 것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고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보호하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가르쳐 주는 바이고 율법의 정신입니다.
한편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은 어떠합니까?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유대 율법사회에서 간음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몰랐을까요? 이 여인도 간음죄로 인해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요즘도 간혹 아랍세계에서는 간음한 남녀를 돌로 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간음죄는 그 정도로 무섭고도 엄청난 죄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 여인은 간음이란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을까요? 초막절 축제 기간 너무 분위기에 들뜬 나머지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서 죄를 지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축구선수 같이 잘 생긴 형제의 파마머리에 반해서 죄를 지었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자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소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으시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 이번 딱 한번만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데 뭘”, “나는 안 들킬 자신이 있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사단의 전략이고 계략입니다. 사단은 한사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우리로 하여금 정욕의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유인합니다. 오늘날 드라마의 대부분 소재가 불륜이고 막장입니다. 음행을 커피 한잔 마시는 것처럼 가볍고 부담 없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수년 전 어떤 영화의 제목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쓰여진 선전문구가 더 기가 막혔습니다. “난 안 들킬 자신이 있어.” 그러니까 결혼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고 결혼을 하기는 하는데 외도를 해도 안 들킬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젊은이들이 과연 어떤 인생을 살겠습니까? 자유롭게 동거하고, 결혼해서도 의연하게 죄를 짓고. 이런 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본문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죄에 대한 욕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정욕의 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6:32,33절은 말씀합니다.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본문의 여인도 죄를 지을 때는 몰래 쾌락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 모든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서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무서운 심판의 순간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여인을 향해 장돌을 들고 당장이라도 쳐 죽일 기세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어떻게, 어떻게 말하겠냐니깐요?” 저는 공보의 근무 시절 시내에 나갔다가 지금 제 나이 또래쯤 되는 소매치기가 현장에서 붙잡혀 젊은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맞는 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저렇게까지 때리는 것은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는 것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살벌했습니다. 이런 살기등등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해야 하실까요? ‘우리 좋게 말로 합시다’, ‘점잖은 사람들이 왜 이래요’해서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돌로 치냐 마느냐 둘 중에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되고 돌로 치라 하면 살인교사 죄가 되어 어떻게 말씀하셔도 그들이 설치한 올무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네 자신을 알라’, 아니면 ‘도찐개찐!’ 무엇이라 쓰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여인에게 집중된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돌리고자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묻기를 마다하지 않자 일어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 하실 줄 알았는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의하면 목격자, 본문에서는 간음현장을 목격한 자들이 먼저 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먼저 돌을 들고 쳐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죄인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 없는 사람만이 정죄할 수 있고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죄가 없습니까? 세상에 죄 없는 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안에 커다란 죄, 곧 미움, 시기, 원망, 정욕, 음란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난 상대방의 죄를 보며 상대적으로 의롭다 생각하고 정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돌로 남을 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자기를 돌아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결코 돌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남을 정죄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발견이 안된 자들이 감히 정죄의 돌을 던집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빌미로 정죄의 댓글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몇 해 전에는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를 결성해서 타블로가 스탠포드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악성댓글을 끊임없이 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판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던 그들은 열등감 때문에 악의적인 글을 올린 것이 결국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헤아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대하는 올바른 하나님 백성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또 ‘먼저 돌로 치라’ 하시므로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여인의 죄는 돌에 맞자 죽을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세우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끌려나왔을 때부터 무서운 정죄의 돌을 맞았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자기 인식이 없는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든 자들에게 말씀의 돌을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떤 죄인인가?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버립니다.(히4:12) 그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자신이 지난 여름에 한 일이 생각났을지 모릅니다. 바늘에 찔려 뜨끔한 사람처럼 이 말씀을 듣자 양심이 심한 가책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들을 때 마비된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비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최고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나갔을까요? 나가는데도 찬물 뜨거운 물 순서가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여인 뿐 아니라 우리도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사람의 평가에 예민해 합니다. 그런데 결국 나를 정죄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다 사라지고 예수님과 나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평가는 다 사리지고 예수님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 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을 생각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남은 때를 살아야 합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정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이렇게 범죄한 여인과 남게 되면 판단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만약 공자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면 ‘내가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회초리를 들었을지 모릅니다. 또 최영장군이 있었더라면 ‘내가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더냐’ 책망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아무도 없는데서 ‘너 도대체 왜 그랬니? 왜 인생을 그렇게 사니? 넌 돌 맛을 좀 봐야해’ 하며 돌로 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이 놓고 간 돌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11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정죄하노니’ 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나는 얼마든지 너를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정죄 받아 마땅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인생들이 얼마나 죄에 연약한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큰 소리치고 결단하지만 다시 죄의 종이 되고 마는 인생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 주님도 육신을 덧입고 오셔서 인생들이 겪는 모든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이 예수님의 깊은 이해와 동정 때문에 죄인들이 죽지 않고 구원받아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용서함으로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서는 조금만 잘못해도 가차 없이 정죄합니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 취급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살리고 죄인을 구원하는 길은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동정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주인공 장발장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갑자기 죽어버린 매형으로 인해 조카들을 부양해야 했던 장발장은 빵을 훔치다 붙잡히게 됩니다. 조카와 누나 생각으로 네 번이나 탈옥을 시도하던 그는 번번이 붙잡히므로 장장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결국 출소하지만 사회의 냉대에 부딪힌 그는 겨우 미리엘 신부가 있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신부님의 호의를 악용하여 교회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붙잡히므로 정말 죄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자신이 그것을 주었다며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냐고 장발장을 적극 옹호함으로 그를 구해줍니다. 쟝발장은 호의를 악용한 자신을 정죄치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주는 미리엘 신부의 용서의 사랑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미리엘 신부의 용서의 사랑이 그를 감동시키고 그를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장발장은 엄마 잃은 코제뜨를 평생 돌보며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형사 자벨 경감을 용서하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용서가 세상의 정죄와 냉대를 이기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처럼 마땅히 정죄하고 돌을 던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용서할 때 생명이 살아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容恕)라는 한자가 의미하는 바처럼 용서는 몹시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손양원 목사님 딸 손동희 권사님은 자신의 두 오빠를 총으로 쏘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였지만 70이 넘어서도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양아들이 죽어가면서 눈물로 자신에게 용서를 빌었을 때 그가 평생 받았을 마음의 고통이 느껴져 마침내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자들은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는다는 값싼 용서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죄를 짓고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셨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과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저주와 죽음의 고통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결코 말로만 하는 용서, ‘그래 한번 봐 줄께’ 하는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죽음의 고통을 통해 이루신 대속의 용서입니다. 여인도 돌에 맞지 않았지만 이미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을 맛보았기 때문에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여인처럼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심판의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는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로 인해 고통하고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죄인도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용서의 표입니다. 이 십자가 아래 나갈 때 어떤 죄를 지은 자도 용서받고 변하여 새 사람 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정죄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우리를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하여 주신 주님의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용서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도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고 영접하고 감당하므로  죄인들이 살아나는 성령의 역사 일어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학생시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 새 인생 살게 되었습니다. 이 기쁨과 은혜에 힘입어 열심히 또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치명적인 약점인 인정문제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힘들어진 저는 마음이 완악해져 심방 오시는 목자님들 피해 달아나고 심방오신 경희사모님에게 눈을 부라리곤 하였습니다. 눈에는 힘을 주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떠난 저의 내면은 심히 고독하였습니다. 이 밀려오는 고독을 이겨보려고 자매를 사귀었는데 처음에는 순수하게 만나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적이 되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로 부르심 받았고 그러한 삶을 배웠다는 사실 앞에 심한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나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저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니가 그래도 생각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토록 형편이 없었다니 정말로 실망했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를 조금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핍박한 죄값을 톡톡히 치룰 줄 알았는데 조금도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놀랍기만 하였습니다. 이 용서의 사랑이 정죄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을 다시 살려 놓았습니다. 제가 이 크신 용서의 은혜를 덧입었는데 자기 죄를 잊고 요즘 사람들은 너무 죄악되다며 판단하고 정죄하길 잘하였습니다. 그리고 싹수가 없다고 소망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제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생각할 때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 정죄치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죄에 연약한 이 시대 영혼들을 이해하고 영접하고 감당하므로 이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정죄 대신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1b절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한번 죄를 지은 사람은 또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는 죄의 맛을 알기 때문이요 그 쾌락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자는 이미 죄로 인해 한번 죽었습니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았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탕감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용서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죄와 싸울 수 있고 거룩한 여정을 갈 수 있습니다. 흔히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이 ‘나 이제 손 씻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로 인해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처절하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용서받았으니까 마음껏 죄를 지어볼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다음에 죄를 짓는 것은 용서해주신 예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요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는 삶, 죄에서 멀어진 삶,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죄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무자비하게 정죄하고 돌로 치려는 사람들과 축제 기간 남몰래 간음의 죄를 짓는 여인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 속에 빛이 없음을 보셨습니다. 초막절 축제 때 제사장이 든 촛대불을 따라가는 의식을 행하므로 광야가운데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였지만 그렇게 한다고 사람들 마음에 빛이 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형광등 네온사인 LED등으로 세상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빛이 없어 그 어느 때보다 어둡습니다. 더 깊은 죄의 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빛 예수님이 그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들고 가는 촛대를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시되 말씀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십니다. 시편119:105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나의 마음에 들어와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밝혀주므로 어둠에 다니지 않게 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을 환하게 비추면 어둠에 다니지 않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어둠에 다니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그 안의 빛이 임하여 어둠을 밝히고 빛된 생각을 하며 빛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 따르고 말거나 몇 번 따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쭉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런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생명력이 가득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정말로 하기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여인이 아이를 낳는 일이요 둘째는 남자가 군대 가는 것이며 세 번째가 용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용서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서 죄의 종으로 사는 자들을 깊이 이해하고 감당하므로 이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각 사람이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세상의 빛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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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25강]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관리자 2014-08-03 2913
541 마태복음 [2015년 성탄 메시지] 내 백성의 목자가 되리라 관리자 2015-12-20 2903
540 이사야 [2014년 신년 제7강] 이방인을 예물로 받으시는 하나님 관리자 2014-02-23 2895
539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8강] 바벨탑 관리자 2013-05-12 2892
538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4강]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관리자 2017-07-16 2890
537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6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서삼문 2011-10-16 2888
536 이사야 [2014년 신년 제5강]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1 관리자 2014-01-26 2887
535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20강]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자 2014-06-22 2884
534 이사야 [2014년 신년 제6강]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관리자 2014-02-16 2884
533 이사야 [2011년 이사야서 제15강]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이사가.. 관리자 2011-02-06 2881
532 히브리서 [2016년 히브리서 제11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관리자 2016-01-10 2880
531 사무엘상 [2011년 신년수양회 제1강]미스바의 영적 부흥(이인구) 관리자 2011-01-02 2877
530 요한복음 [2015년 요한복음 제11강]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관리자 2015-05-31 2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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