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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24 (일) 10:55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24년_마가복음_제3강-1.hwp (96KB)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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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3강]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024년 마가복음 제3강                                                            이 인구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가복음 2;1-17
요절/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은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진짜 죄인입니다. 오늘 말씀의 중풍병자와 세리레위는 서로 다른 부류의 죄인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오신 영적의사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 받고 건강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 1장,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1-12)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친 수일 후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음 받은 후 예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 지방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는데 벌써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됐습니다. 그들은 각종 병자들, 귀신들린 자와 그들을 데리고 온 가족과 친구들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구경 온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금 닥친 현실문제를 해결해 주기 전 먼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깨우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왜냐면 모든 인생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잃은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중 4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집문 앞에 왔습니다. 그 병자는 심한 중풍병으로 인해 온 종일 침상에 누워지내야 했습니다. 혼자서는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고 식사도 먹여줘야 했습니다. 아기는 매일 대소변을 갈아주고 먹여줘도 무럭무럭 자라나 주위의 큰 기쁨이 되지만, 온갖 보살핌에도 추하게 늙어가는 중풍병자는 모든 이들에게 큰 고통과 짐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풍병자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4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각자 먹고 사느라 항상 중풍병자 옆에 있지는 못했지만 언제든 그를 돕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중풍병자를 같이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문 앞에서 곧 밟혀 넘어질 것 같은 넘쳐나는 인파를 보았습니다. 5분 간격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해도 오늘 하루가 다 갈텐데 예수님은 도를 전하시면서 언제 치료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늘구멍도 보이지 않는 장벽앞에서 그들은 합심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할 때는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다 지붕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한편 집안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감동의 물결속에서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이 질병에 매인 이 땅의 현실에서 눈을 들어 그들을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감동가운데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집 천장에서 흙먼지가 나더니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리는가 너도 나도 일어나 천정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그런데 그 구멍으로 삐거덕거리며 침상이 내려오는데 그 침상 위에 누워있는 시커먼 얼굴을 보며 사람들의 얼굴은 희망에서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예수님 앞에 내려왔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모든 이들이 중풍병자를 판단하고 분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사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나라와 은행이 망하지 않을 것을 믿고 돈과 주식을 거래합니다. 또 의사를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카페에서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옵니다. 심지어 어떤 믿음 좋은 부모는 자녀가 매일 핸드폰만 보지만 믿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갈수록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많은 이들이 믿고 거래한 집이 실상은 깡통으로 전세사기에 당하고 은행을 믿고 모든 퇴직금을 투자한 금융상품에 큰 손실을 보고 절망합니다. 심지어 요사이는 AI를 이용한 딥페이크(deepfake)기술로 아는 사람의 음성과 영상까지 조작한 보이스피싱 사기까지 이루어져 의심없이 믿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께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율법을 어기고 고쳐주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사람 구실도 못하는 중풍병자도 긍휼히 여기셔서 치유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추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믿고 어떻게 하든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믿음은 단순하지만 강했습니다. 믿음은 간절하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11;1a)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처음 자식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것에서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나온 그들에게 큰 장애물이 막았습니다. 믿음에는 항상 장애물이 생깁니다. 내면의 불신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나왔는데 왜 또 장애물인가 의심할수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견고해지고 순수해집니다. 처음 믿음은 자신의 바램이고 의지가 크지만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있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있는 자는 장애물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 바라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한계상황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인도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길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나를 얽매이는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함으로 생각이 긍정적이 되고 용기가 생깁니다. 믿음의 담대한 내면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번득이는 창조적 지혜와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꼭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고집했다면 지붕을 뜯을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갈 길을 찾았을 때 2차원적(평면적)사고방식을 뛰어넘어 3차원적(입체적)인 눈으로 지붕을 통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믿음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자신의 한계적 생각과 경험에 갇힐 때가 많습니다. 또 세상문화는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전통은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자신의 이성이나 감정을 극복할 수 있고 세상의 관습적 문화와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믿음이라도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새벽부터 기다린 사람 앞에서 새치기 한 것은 잘못 아닙니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주변의 모든 이들이 다 믿음으로 온 이들은 아닙니다. 병자나 가족들도 정말 고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시험하는 이들도 많았고 또 그냥 구경오거나 심지어 예수님을 트집잡고자 모인 이들도 많았습니다. 또 유대인집 지붕은 우리나라 기와집처럼 뚫으면 집이 무너질 것같은 구조가 아니라 수시로 교체할 수 있는 가변식 지붕입니다. 예수님은 진흙속의 진주처럼, 수많은 믿음없는 무리들 속에서 믿음으로 나온 그들을 알아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나가십니다. 한 사람의 도전하는 믿음은 운명을 바꾸고 세상역사를 바꿉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전하는 믿음을 얻으려면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 상식적인 생각,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와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눈을 들어 나를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받으시고 중풍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는 중풍병을 낫기 위한 간절한 소원가운데 예수님께 왔기 때문에 당장 중풍병의 치료가 급선무처럼 보입니다. 중풍병에서 일어설 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자신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나만을 사랑해줄 사람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얻는다 해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중풍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병치유 이전에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 사함이 더 필요하고 급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창1;28) 이 사명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과 동시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죄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간의 존재의미와 목적과 행복이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될 때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파괴되고 세상과의 관계성도 파괴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과 동역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될 인간이 세상 영광과 물질을 얻기 위해 우상으로 삼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싸우며 하나님을 떠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불쌍하게 누워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죄 사함이 필요한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누워 끝없는 생각의 죄를 짓게 됐습니다. 모든 죄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엔 자신에게 정신적 충격을 준 사람들에 분노하고 제대로 치료못하는 의사를 판단하고 이렇게 낳은 부모를 원망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분노하고 판단하고 원망하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중풍병만 나으면 원망, 불평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되지만 병이 나아도 새로운 문제속에서 새로운 죄에 빠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의 인생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중풍병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아이는 엄마를 잃어버려 굶주리고 몸에 상처도 생기고 신발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밥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엄마 없이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신발을 사주어도 그 아이에게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작은 자는 'Son' 즉 자녀입니다. 죄를 짓기 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죄로 인해 잃어버린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많은 이들이 놀랐지만 무리들 틈 사이 숨어있던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사실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집에서 동생이 장난치다 아빠차를 망가뜨렸을 때 형이 “빵을 사다주면 내가 이번만은 용서해줄게. 절대 아빠에게 말 안할께!” 말한다면 용서가 됩니까? 엄마가 “꾸중듣지 않도록 아빠에게 잘 말할게!” 하면 작은 위로는 되지만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차의 주인이신 아빠가 ‘괜찮아!’ 한마디 해야 죄 사함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오직 세상과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용서해야 죄가 사해질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는 알았지만 둘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간절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의 역사를 보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식과 시기심, 형식주의의 죄 가운데 눈이 멀어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와 친구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반문하셨습니다. 물론 죄 사함과 중풍병의 치유는 둘 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죄 사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풍병의 치유는 눈에 보이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또한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에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처음에 침상이 그를 들고 왔지만, 죄사함을 받은 후 이제 그가 침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죄의 병에서 일어섬으로 중풍병뿐 아니라 죄를 사함 받는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됐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중풍병자는 많이 치유 되고 있지만 영적인 중풍병자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치료받는 우울증환자가 2017년 68만명에서 2021년 91만명으로 34%나 늘었고 20, 30대 청년 우울증환자는 거의 50%나 늘었습니다. 특히 20대는 128%나 증가되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코로나19와 급변하는 사회 환경탓에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 학업. 결혼. 경제의 어려움등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증가시켰습니다. 우울증으로 치료받지 않아도 수많은 청년들이 양육강식같은 치열한 세상의 경쟁 속에서 잠간 뒤쳐질 때 무기력과 패배감에 빠져 중풍병자처럼 자리에 누워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래부터 게으르거나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릴 때 착하고 부모말도 잘듣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경쟁 속에서 한두번 실패하고 뒤처지면서 패배감과 무기력에 빠지고 불안속에 자리에 누워 현실을 도피하며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죄책감에 고통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설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아들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은 F 맞은 점수를 구제해줘서 다시 한 번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재수나 삼수가 아닙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줄테니 다시 일어서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인생성과를 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통해 죽어가는 죄의 종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로 치유되고 회복되길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길 바라십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이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치 나무줄기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결국 시들어 말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신자들은 설사 현실문제를 해결 받지 못해도 죄 사함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높은 지위나 권세가 없어도 하나님나라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병이 있지만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죄 사함 없이 병 나은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왜냐면 그는 죄 사함을 통해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영광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며 진정한 기쁨과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자신의 형편과 조건이 어떻든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감으로 죄 사함과 치유의 은혜를 얻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 2장, 나를 따르라(13-17)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 예수님이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자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또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의 감동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동떨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과 멀리 떨어져 외롭게 세관에 앉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레위였고 당시 창기와 함께 공인된 죄인 취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해 유대인들 중에서 빠릿빠릿하고 양심에서 자유로운 자를 세리로 고용해 세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돈을 뺏긴 배고픈 동족들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지만 그들은 그렇게 착취한 돈의 일부를 상납한 후 나머지로 배부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왜 그런 파렴치한 죄인의 삶을 살게 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혼란한 세상가운데 줄 없고 백 없고 소외되고 가난했던 밑바닥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또 자신의 인간적 성공을 위해 세리의 삶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많은 욕을 먹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돈만 벌게 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느 로마시인(호라티우스)이 말한 ‘카르페 디엠’(오늘을 붙잡하라!)가 그의 가치관이 되었습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과거의 비참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현재(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많은 돈을 붙드는 것이 그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는 불쾌한 꿈을 자주 꿨습니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고인을 위해 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이가 다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고인의 이름을 보니 자기 이름이었습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그가 이런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돌이킬 수 없을 때였습니다.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들을 따라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아갈 용기도 믿음도 없었고 중풍병자처럼 데려다 줄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늘도 돈통을 친구삼아 세관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이런 레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그에게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방향전환 하라는 회개의 말씀이었고 예수님을 좇아 새 인생을 출발하라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좇는 헛된 인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이제부터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용감하지만 무식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도 놀랍지만, 공인된 죄인인 세리를 제자로 부르는 것은 너무 파격적이었습니다. 설사 그가 어부들이나 중풍병자에 비해 능력이 있다 해도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살았던 자가 하루아침에 하나님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지는 불확실했습니다. 더구나 자기만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많은 악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정죄의 눈으로 그를 봤지만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눈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잔인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눈초리 속에서 깊은 외로움과 고통을 보셨습니다. 친구가 떠나고 이웃이 떠나고 모든 이들이 떠났지만 아직도 움켜쥔 돈 통을 놓지 못하는 한 인간의 실상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어두운 주변을 맴도는 잃어버린 한 인간의 실존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제자 삼으시고 그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레위 내면의 깊은 죄의 병은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함께 하시며 감당해 줘야 치유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함께 하시며 감당해 줬을 때, 모든 이들에게 피해만 주었던 죄인 레위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을 증거한 성 마태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레위는 끝까지 자신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임마누엘’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b)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은 어부제자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족들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갈 배와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어부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레위는 세관에서 나온 후 다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배를 불태우고 전쟁에 나간 군사들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큰 믿음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 또한 큰 믿음입니다. 레위는 믿음으로 결단한 후 마지막 남아있던 물질로 동료세리들과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항상 같이 밥먹을 친구가 없어 혼자 식사했던 레위였습니다. 믿음의 삶 후에도 그에게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지만 기쁨으로 먼저 다가가 함께 식사할 것을 초청했습니다. 레위가 벌린 큰 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뿐 아니라 동료 죄인들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은혜로운 음식 냄새를 맡고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지저분한 병자를 고쳐주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7) 예수님은 병든 죄인들을 고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적 의사이십니다.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코로나19가 지나면서 일회용품과 폐기물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일회용 플라스틱병이나 컵뿐 아니라 옷이나 신발도 몇 번 쓰고 폐기처분합니다. 심지어 10년 이상 쓸 수 있는 TV나 핸드폰도 유행에 맞지 않는다고, 더 좋은 제품이 나왔다고 조금 쓰다 폐기처분합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은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몇 년 살아보고 자신과 안 맞는다고 이혼으로 폐기처분하며 또 어떤 유튜버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과거의 작은 잘못도 적나라하게 파헤쳐 영원히 폐기처분하고자 합니다. 이런 세상속에서 많은 이들이 작은 죄에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절망하며 인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막가는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한 번의 죄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폐기처분당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포기해 폐기처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리같은 죄인들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격리시켜 폐기처분함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 깨끗하고 건강한 세상을 만드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할 때 부정해지고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의사로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병에 걸린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 고쳐주시고 깨끗케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악한 영향을 안받기 위해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심으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어둠은 피하거나 격리시킴으로 없앨 수 없지만 생명의 빛을 받아들임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영적 의사로 오셨고 의사가 해야 할 일은 죄인을 불러 돌이켜 회개시키는데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은 어떤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병든 자로 보시고 치료만 하면 얼마든지 건강한 자가 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치료해주십니다. 왜냐면 그들은 죄의 종이 되기 전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의사도 건강한 자에게는 쓸데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은 건강한 자, 의인으로 여길 때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무 죄도 없는 의인으로 여기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고쳐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하고 중풍병자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나오는 이는 어떤 고질적인 병도 고쳐주십니다. 적극적으로 나아오지 못해도 레위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영접하면 어떤 죄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병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 레위나 중풍병자는 고침 받고 새 삶을 시작했지만 인정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죄는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진정한 의사는 환자에게 왜 병에 걸렸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사되신 예수님께서는 처음 온 환자뿐 아니라 다시 같은 병에 걸려 와도 책망치 않고 고쳐주심으로 새 인생을 살게 도와주십니다. 진정한 의사되신 예수님은 죽을병을 안고 사는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그들 대신 희생되심으로 어떤 이의 불치병이라도 완치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최근 뉴스에서는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같은 죄인들의 ‘묻지마 범죄’를 연일 보도하면서 더욱 믿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치과를 개업한지 20년이 지나 많은 단골환자들이 생겼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진상환자들 때문에 수명이 단축되는 것 같은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슈퍼맨같은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세상 모든 죄인들을 가차없이 심판해 사회정의를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습니다. 새학기 봄이 되어 캠퍼스 전도의 때가 됐지만 캠퍼스에 나가는것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로 떨어진 경쟁사회속에서 학생들도 과거처럼 순수하지 않아 전도를 거부하고 거짓 전화번호를 주는 것을 넘어 신고까지 한다는 소문이 들려 캠퍼스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종교지도자들같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더 큰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인들에게 영적의사로 오셔서 부르시고 죄를 용서해주시고 제자 삼으셔서 치유하고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저는 과거 세리같은 이기심의 죄인이었고 학생 때 인생 고난 중에는 불신과 원망의 중풍병자같은 죄인이었고 나이 들어서는 종교 지도자같은 외식과 교만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제자요 목자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자로서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얼마 전 졸업한 이마태오목자는 과거 고등학교 때는 소문난 문제아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목자님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인도했을 때 어느새 한계를 극복하는(불신의 지붕을 뚫는) 믿음으로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 마태같은 목자로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양들의 드러난 죄만을 보지 않고 그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돕고 인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로 병든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죄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자랑스런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자신의 죄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 사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께 치유받고 구원받은 자녀로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중풍병자같은, 세리같은 캠퍼스 죄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섬기는 인생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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