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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9-28 (일) 12:22
분 류 요한일서
첨부#1 요한1서1강-1(최동진).hwp (58KB) (Down: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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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요한1서 제1강] 성도의 사귐

2014년 요한 1서 제 1강                                                                      최동진

성도의 사귐

말씀: 요한 1서 1:1-2:11
요절: 요한 1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이라”


  기독교는 사귐의 종교입니다. 여기서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사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육신의 부활을 부인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 상호간의 참된 사귐을 방해하였습니다. 요한1서는 신자들이 이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사귐을 갖도록 돕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도간의 사귐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닫고 서로 간에 진실된 사귐을 통해 기쁨이 충만한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1:1-4)
  1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말씀은 ‘로고스’로서 사도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요1:1) 예수님은 본래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묵상하거나 열심히 연구를 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그의 증거는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저 멀리 계셔서 죄인들이 감히 함께 할 수 없는 거룩한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보고 듣고 만지며 사귐을 가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첫 시간 예수님께 나아가 음성을 듣고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관념적이거나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서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참된 지혜와 위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 듣고 보고 사귄 바를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공통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취미가 같거나, 같은 학교 출신이거나, 같은 학문을 하거나, 같은 학번이라든지, 때로는 같은 동네에 사는 것 등으로 공통점을 찾아서 사귐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귐은 서로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성도 간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므로 진실되고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영(spirit)이 통하고 같은 가치관과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와 냄새나는 인간들과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사귐을 나누며 복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명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사귐이 깨어지고 사단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깨어진 인간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못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깨어진 인간은 인간 상호간에도 바른 사귐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남자는 여자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사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귐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낮아져 오셔서 각종 죄인들을 섬기시고 교제해 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과 새 삶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이 거칠고 억센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세리출신 마태도 있었고, 의심 많은 도마, 심지어는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지각색의 죄와 허물이 많은 제자들과 3년동안 함께 하시며 때를 따라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훈련도 시키시며 깊은 인격적인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귐을 통하여 마침내 제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얻고 세계를 품고 섬기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생명 구원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사귐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관계성 단절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 도처에 극한 갈등과 대립만 있고 화합과 동역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각종 모임은 많은 것 같은데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젊은이들은 감각적이고 비인격적인 사귐에 머물러 있게 되었고, 가족 공동체마저도 사귐이 없는 편리한 합숙소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가정문제, 청소년문제, 노사문제, 세대간 갈등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신자들마저도 시대의 악영향을 받아 개인 투쟁은 잘 하지만 성도간의 사귐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영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바라보면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사귐이 있는 많은 모임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1:1과 GBS, 요회 모임과 새벽기도모임, 토요미팅, 소감발표모임을 통하여 풍성한 영적 교제를 갖게 하셨습니다. 영적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몸과 영혼이 지친 평신도목자님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사도회모임도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있는 사도회 MT는 모든 목자님들이 사모하는 사도회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각 팀별, 단대별, Grade 별로 많은 은혜로운 사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젊은 날 장막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귐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시편 기자는 형제들의 사귐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여러 모임들을 통해 영적인 동지애를 느끼고 캠퍼스와 직장과 각자 처한 곳에서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귐을 잘 보전하고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나아가서 좀 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영적 사귐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이 서신을 통해 성도 간에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영적인 사귐을 가질 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신자들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간의 사귐이 없는 신앙생활만으로는 기쁨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기쁨을 채우려 하지만 공허함만 더할 뿐이고 지치고 피곤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도 간의 영적 사귐을 통해 얻는 기쁨은 세상에서 물질이나 육신의 만족에서 얻는 일시적인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영혼의 기쁨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참된 사귐이 활발히 이루어짐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하나님은 빛이시라(5-10)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귐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도 빛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온 우주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첫째로, 어둠 가운데 행하면 안 됩니다.
  어둠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죄와 사망권세가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운명적인 생각에 장래 염려와 불신에 시달린다면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내 속에 있는 교만과 불신, 욕심과 이기심, 정욕과 게으름 등 죄를 회개함으로 어둠의 세력과 싸우고 어둠을 물리쳐야 합니다.
둘째로,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기에 힘쓰며,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어떤 복을 받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서로 진실하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않고 숨기는 것이 있을 때 사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간에 아름다운 사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울 정도로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사함 받고 변화되었을 때 형 에서와의 관계도 회복되어 형의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날 때 내면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성도간의 진실된 사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지만 여전히 실수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거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행하면 오히려 완벽한 체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임보다 은혜가 넘치는 사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사귐을 나누기 위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죄의 장벽입니다. 그러므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과 사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죄는 죄를 범하는 그 자체보다 죄를 범하면서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죄를 깨닫지 못한 것이거나 가인과 같이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이는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죄에서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죄 문제 해결은 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숨기고자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드러나면 심판 받지 않을까, 완전히 죄인으로 낙인 찍혀 무시 받지 않을까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9) 이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울왕은 범죄 한 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더 이상 그와 사귐을 가질 수 없으셨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울보다 더 심각한 죄를 범했지만 진실하게 죄를 자백하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용서하시고 다시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은혜와 기쁨이 넘치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우리가 모든 오해와 불신과 인간적인 생각을 회개하고 더욱 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사귐을 가져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성도의 모임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III. 빛 가운데 거하라(2:1-11)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성도들이 죄를 범치 않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도의 사귐이 힘든 이유가 시간이 없어서, 서로 관심이 달라서,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세대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죄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성도간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죄는 성도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시기, 질투, 미움, 무관심을 불러 일으켜 사귐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성도 간에 영적인 사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롭게 살던 다윗 왕도 한순간 자기 소욕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죄를 짓고 그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고, 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치 않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그래도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를 위해 대언자로 오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대언자란 변호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정죄하거나 잘라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대언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짐승을 화목제물로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그라지게 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올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독생자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짐승 대신 친히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완전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이미 다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10:19)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단은 우리의 양심을 찔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더욱이 범죄 하지 않고자 애를 쓰는데도 범죄 하면 사단은 여지없이 나를 고소하여 절망의 늪에 빠뜨립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기 위해 새벽기도를 하고자 굳게 결심을 하지만 몇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면 절망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주시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죄 값을 이미 다 치르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누릴 수 있습니다.
  3-6절에서는 그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알게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인격적이고 내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격과 거룩함과 그 사랑의 범위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의무감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딱딱한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환난이나 핍박이 몰아닥치면 쉽게 무너져 곧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박으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는 생활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함으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성숙한 자로 변화됩니다.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알기 때문에 어떤 유혹이 와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며 복음역사에 자발적으로 헌신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가 누리는 또 다른 은혜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거나 불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계명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어 그 사랑에 대해 결코 편견이나 오해가 없습니다. 대게 계명의 말씀을 율법적이고 딱딱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지키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고 완전하게 되는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그들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곧 그들이 평소 듣던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합니다.(7) 8절을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앞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새 계명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는 옛 계명과 새 계명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옛 계명의 성취요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을 마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주신 절대 계명입니다. 우리가 새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를 사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빛에 거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거리낌’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tumble)로서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빛 가운데 거하면 분별력이 생겨서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고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반면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그 마음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11)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형제를 올바로 도울 수가 없습니다.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순종할 때 궁극적으로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순종할 때 마음에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예수님 안에서 진실된 사귐이 이뤄지게 됩니다. 빛 가운데 행하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3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진실된 사귐을 가지며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임에 사랑이 안 느껴진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었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섭섭하고 힘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시간에도 여러 모임과 캠퍼스 심방과 1대1과 GBS로 말씀을 가르치고 주일 메시지 말씀도 섬기면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은 잘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나의 죄와 허물을 들고 나아가기보다 시니어 목자로서 나의 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므로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사귐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동역자들과 외형적으로는 특별한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 진실된 성도의 사귐을 갖는데 소홀했습니다. 제가 먼저 저의 죄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진실되게 회개함으로 마음에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사귐에 앞장서겠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은 말씀에 순종하고 형제를 진실 되게 사랑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순종함으로 내 마음이 생명의 빛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의 진실된 사귐이 잘 이뤄짐으로 우리 모임에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나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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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 신명기 [2015년 신명기 제11강] 평생에 옆에 두고 읽어라 관리자 2015-01-25 2672
502 누가복음 [2011년 여름수양회 제6강]하나님의 그리스도-문대범 리스닝 2011-08-17 2670
501 마태복음 [2015년 성탄 제2강]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관리자 2015-12-13 2669
500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9강]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관리자 2011-11-06 2658
499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3강]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관리자 2017-07-09 2652
498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1강] 요나보다 더 큰 이 관리자 2011-09-11 2651
497 로마서 [2015년 가을 준비 특강 제4강] 거룩한 산 제물 관리자 2015-09-06 2650
496 시편 [2012년 추수 감사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관리자 2012-11-18 2639
495 고린도후서 [2017년 고린도후서 제9강] 약한 것을 자랑하는 바울 관리자 2017-12-03 2638
494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4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관리자 2017-02-26 2635
493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2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관리자 2017-07-02 2631
492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8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관리자 2017-08-13 2630
491 누가복음 [2011년 여름바이블캠프준비특강(1)]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리스닝 2011-08-01 2626
490 요한복음 [2010년요한복음제20강]내가 왕이니라 리스닝 2010-07-18 2625
489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15강]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관리자 2014-05-18 2622
488 사도행전 [2016년 사도행전 제6강]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관리자 2016-04-24 2619
487 이사야 [2015년 성탄 제1강]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관리자 2015-12-06 2619
486 누가복음 [2014년 성탄 제1강]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 관리자 2014-12-07 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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